일상생활에 활력소가 되는 여행을 하기 위해 몇 년마다 한 번씩 고국을 방문하고 있다. 이번에는 한 사람의 고집과 집착의 결과가 고스란히 전시된 추억의 50-60년대 역사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파주에 들렸다. 도시관광의 일원으로 ‘헤이리 예술인마을’을 찾은 것은 노년이 된 엄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려는 큰아들의 각별한 선물이었다. ‘헤이리’란 한강 이북에서 옛날 농부들이 논맬 때 부르던 농요(農謠, georgic)에서 유래한 것이란다.
박물관 입구에 놓여있는 빨간 머리 우체통에 잠시 손을 넣어 본다. 창고 같은 지하 일층과 지상 삼층에 빼곡히 들어찬 실물과 사진에는 삐걱거리는 층계가 고물이듯 손때 묻은 흔적들 또한 옛 시대 그대로 녹아있다. 수없이 눈과 손이 오갔을 멈춰선 벽시계와 다이얼 전화기를 보면서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가슴에 차오른다. 흑백 TV와 전화기를 가진 것만으로도 큰 부자가 된 것 같았던 그 시절.
삼천리 자전거 한 대면 어디든지 못 갈 곳이 없었던 낡은 자전거들이 흙먼지를 털고 주인을 기다리듯 서 있다. 병원 가기가 쉽지 않던 때 약국에서 구입한 원기소를 비타민 복용하듯 매일 먹었던 영양제와 구룬산, 이, 벼룩, 진딧물 퇴치용 피디피, 조제실 안에 약국 아저씨가 마네킹이 되어 물끄러미 서있다. 뜨거운 한여름 냉장고가 없던 시절 얼음가게에 전화가 폭주하여 불통이 될 때는 아예 새끼줄에 얼음을 묶어 종종 걸음으로 택배 심부름을 하던 일은 여름날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사각형 나무통을 둘러메고 “아~이스케키”를 외치던 소년, 싱싱한 이빨로 한 입 깨물면 여름이 저만치 달아난다. 골목길 처마 밑에는 아이들 군것질 거리로 뽑기 아저씨가 연탄불 위에 설탕물을 끓여 각가지 모양으로 본을 뜨고 있고,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쪼그리고 앉아 결따라 손에 땀을 쥐고 본을 뜨느라 집중하던 그 물엿의 맛이란….
눈깔사탕 몇 개면 하루의 간식이 되던 시절도 있었지. 그뿐이랴, 실물크기의 학교교실에도 들어가 보았다.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교실 가운데 피워둔 연탄스토브 위에는 아이들이 갖고 온 양은도시락이 층층이 올려 있다. 뜨거운 스토브 위에서 유독 김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책보자기에 김치물이 베여 곤혹스러웠던 기억은 차치하고, 도시락을 열면 밥과 함께 뒤범벅이 된 김치를 아예 비벼 먹던 점심시간. 콩조림, 멸치조림, 계란말이가 대부분 도시락 반찬의 전부였다면 간간이 소고기 장조림은 별미였으리라.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낱낱이 보여주는 이발소, 지게, 전당포, “뻥이요” 소리에 놀라 귀 막는 옥수수 뻥튀기 기계, 인력을 구하는 벽보, 한 발로 버스에 잽싸게 오르며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 차장 아가씨, 구두 수선, 장날 풍경, 연탄가게, 국밥집,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보건복지부 가족계획 선전포스터, 하나 같이 옛 시절을 떠 올리게 한다.
서민들의 먹거리, ‘덕이 분식집’ 내부에는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 둘이서 만두를 먹으며 양은 주전자를 사이에 두고 쑥스러운 듯 데이트 중이다. 팥빙수, 수박 냉차도 얼음 덩어리를 갈아 줄 낯익은 기계도 보인다. 보고 또 보아도 어느 것 하나 잊을 수 없는 추억 속의 물건들이다. 극장 앞에는 옛 배우들의 포스터와 구성진 가요가 은은히 흘러나온다.
그러나 일상생활은 단지 불편했을 뿐, 쓰레기 속에서 장미꽃을 피우듯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우리의 대단한 민족사를 뒤돌아보면서 귀중한 교훈을 얻은 역사박물관 관람이었다.
<
윤영순 우드스톡, MD>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