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져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두 친구와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방으로 들어갔다. 복도도 어두웠고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건물이 텅 비어있었다. 밖은 깜깜했고 우리를 데려다준 버스도 온데간데 없었다. “얘들아, 우리만 빼놓고 다들 가 버렸나 봐!” 소리를 지르다 자명종 소리에 눈을 떴다. ‘무슨 그런 꿈을... 설마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직 가슴이 뛰고 꿈이 생생하다.
그들은 내 대학 동창이다. 학창 시절에 우린 일명 삼총사였다. 지난달에 그들과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수십 년 만의 행보였다. 대학 졸업 여행 이후 처음으로 셋이 함께 한 시간이었다. K가 먼저 결혼을 해서, S와 단둘이 태국에 같이 간 적도 있었지만, 자식들과 직장 일 때문에 셋이 같이 움직일 생각은 해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내가 한국을 떠나 왔기에 더더욱 기회가 없었다. 요즘 그들은 자식 다 키워놓고, 하던 일마저 은퇴하고 얼마 전부터 가끔 둘이서 여행을 같이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사는 데다, 늦깎이였던 나는 아직 아이들과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터라 그들과 같이하는 장기간 여행은 엄두도 못내었다. 벼르고 벼르다 함께 유럽에 가기로 하고 몇 달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했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겨 못 가게 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던 여행이었다.
강이나 운하를 따라 삼원색을 이용한 도형들의 조합 같은 건물들이 어우러지는 여행지의 이국적인 풍경을 함께 즐겼다. 아침에 눈 떠서부터 하루종일 수다 떨고, 서로 번갈아 짝지어 온갖 포즈를 지어가며 사진 찍고 찍히느라 바빴다. 저녁이면 숙소에 돌아가 찍은 사진 돌려보며 꿈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K가 자기 딸이 엄마 젊어지라고 어버이날 선물로 주었다는 LED 마스크를 여행지에 들고 와서 밤마다 돌려가며 마사지하며 같이 다시 젊어지기를 고대했다.
10년 후에 다시 함께 여행하기로 약속하고 아쉽게 헤어져 돌아와 그 즐겁던 기억과 기운이 다 가시기도 전에, 내가 여행에서 돌아온 지 약 열흘쯤 후에 신문에 헝가리 다뉴브강에 떠 있던 허블레아니호 유람선이 대형 선박에 들이 받쳐 침몰했다는 기사가 났다. 한국인 관광객 30여 명이 승선하고 있었고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망 또는 실종되었다고 했다. 내가 그 유람선을 탔던 건 아니지만 이곳저곳을 돌며 암스테르담을 비롯해 운하가 있는 여러 도시에서 유람선을 탔었기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항상 그렇듯이 큰 사고 뒤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유난히도 많이 뒤따른다. 이번 기사 중에 내 가슴을 가장 섬뜩하게 한 건 60대의 여고 동창생 3명이 모처럼 같이 여행 갔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한 명은 구조되어 병원 치료 중이고 한 명은 사체로 발견되었으며 나머지 한 명의 친구는 실종이라고 했다. 그들도 우리처럼 이렇게 저렇게 겨우 껴맞추며 기대에 부풀었던 여행이었음이 틀림없다. 거의 평생을 서로의 힘이 되며 지내온 친구들이 한순간 어이없이 갈라진 운명 속에 놓이고 말았다. 살아남은 친구의 비통함, 먼저 가버린 친구에 대한 허망함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겐 두려운 충격이었다. 그 사고를 낸 크루즈 선장이 두어 달 전에 네덜란드에서 유람선을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기도 했다는 기사까지 덧붙여진 걸 보니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았던 건가.
아마도 유람선의 사고 때문에 그런 무서운 꿈을 꾼 모양이다. 비록 꿈이지만 어둠 속에 남겨졌어도 친구들과 함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나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든다. 부끄럽게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보고 나서야 사십여 년을 지켜온 우리의 우정이 새삼스럽게 감사하고 소중하게 느껴지고 나를 안도하게 한다. 먼저 가신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살아남았어도 고통받는 분들과 모든 가족이 하루빨리 악몽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빌어 본다.
<
김인숙 워싱턴문인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