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물러가는 즈음의 오후, 홀로 야외 벤치에 앉았다. 시끌벅적했던 여름이 지나고 모든 것이 조금은 힘이 빠지고 비어 있는 느낌이다. 도서관에 반납하려고 가져왔던 책 한 권을 다시 집어든다. ‘잊을 수 없는 밥 한그릇’이라는 수필집이다. 미국에 살면서부터는 한국 음식을 먹는 것도 소중하지만 한글로 된 좋은 글을 읽는 것도 큰 위로가 된다. 게다가 음식에 대해 쓴 글이라니! 색다른 음식에 대한 글이면 흥미롭고 따뜻한 추억이 도사린 글이면 마음이 뜨뜻하게 차오른다. 처음 읽는 것처럼 한 줄 한 줄 천천히 음미한다. 한국에 살 때는 정작 사먹던 칼국수를 직접 반죽해서 먹어봐야겠다는 야심찬 다짐도 해본다.
한참 음식 생각을 하다보니 배가 출출해져서 도서관 구석에 위치한 구식 카페에 들렀다. 그곳에는 나 말고 아무 손님도 없어서 고즈넉하다. 밤갈색 머리를 금발로 염색한 스페니쉬 여주인은 염색한 지가 오래되었는지 머리 색깔이 반반이다. 손님이 없는 동안 차에 가서는 주전부리로 팔 과자가 담긴 큰 박스를 들고 온다. 코스코에서 30개 들이 과자박스를 11불 정도에 사서는 한 봉지에 1.5불씩 파는 걸 보니 매우 남는 장사처럼 보인다. 장사 머리가 좋다. 지나가며 오늘 오후의 유일한 손님인 듯한 나를 보고 싱긋 웃어 보인다. 나도 마주 웃는다. 그리고 카페 주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초코 크루와상 하나와 커피를 마시며 글 속의 음식들은 마음에 채운다.
그때 도서관 중문 뒤에서 깔깔 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른한 오후에 생기를 더하는 소리. 그것은 저너머 바다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온 파도가 천천히 내 발을 적시고 말았을 때야 알아차리게 되는, 그런 느리지만 세찬 감격이다. 내 아이의 웃음이 섞인 아이들의 명랑한 소리, 우유 거품이 가득한 에스프레소, 따뜻한 책 한 권, 그리고 고요함과 약간의 무료함까지 더해져 미소가 번진다. 나는 곧 느린 오후의 상념에서 깨어나 오늘 같은 날 적절한 메뉴가 무엇일까 떠올려 본다. 오늘 저녁은 잘 우려낸 육수에 여린 배춧잎과 청경채, 버섯과 만두, 그리고 얇은 소고기를 듬뿍 넣은 샤브샤브를 준비해야겠다. 아이가 좋아하는 우동도 넣어줘야지. 식구들이 모두 좋아하는 뜨끈한 음식을 함께 먹고 나면 마음과 몸의 허기가 모두 채워질 것이다. 따뜻한 밥 한 그릇으로 또 이렇게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한연선 (더밀크 리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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