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자가 격리를 시작한 지 일주일째다. 외출을 못 하니 시간은 많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자연스럽게 글을 더 쓰고, 책을 더 읽고, 음악을 더 많이 듣고 있지만, 문득 외로워질 때도 있고 무료함을 넘어선 게으름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것저것 다 해보고도 시간이 남을 때면, 재미있게 봤던 옛 영화들을 다시 보기도 한다. 며칠 전, 어릴 때 봤던 작품 하나를 찾아 틀었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장면에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얼굴이 보였다. 이 배우가 이 역할로 출연했던 걸 내가 왜 몰랐을까, 잊고 있었나? 묵묵히 본인의 시간에 맞춰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그 배우의 끈기와 열정도 대단했지만, 사실 나를 더 놀라게 만든 건 그녀를 알아본 후에 나에게 온 시각적 변화였다.
낯이 익은 그 배우가 화면 한 곳을 채우자, 작은 장면도 괜히 더 커 보인다. 괜스레 대사 한마디에 의미가 더 담겨 있는 것도 같고, 왠지 그 역할이 나중에 뭔가 큰 비중을 차지할 것만 같아 기대된다. 오히려 그때의 주연보다 더 빛나고 우월해 보이는 순간도 생긴다. 내가 집중하게 되는 인물이 바뀌자, 원래 알고 있던 결말이 다르게 느껴지고, 주연과 조연, 엑스트라의 구분이 불분명해지고, 처음에는 먼지처럼 보이지 않았던 섬세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변화들이었다.
최근 나는 삶 속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가 예전 편지들이 가득 담긴 상자 하나를 찾았다. 몇 시간을 움직이지도 않고 읽기 시작한 수많은 편지 중에 반듯하게 접혀 있는 낯선 노트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빼곡히 적혀 있는 편지의 끝에는 이름 석 자도 남겨져 있지 않았는데, 나는 단번에 글쓴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래된 친구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오르자마자, 숨은 그림을 찾은 듯, 무료했던 흑백의 그 시절에 새로운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내 부족한 기억, 그 사이 사이에 잊고 있던 친구의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물론 우리는 영화 속에 존재하는 배역들도 아니고, 매 순간이 영화처럼 깔끔하게 기록되어 남겨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내 기억을 다시 보기 하며 그때는 미처 알아보지 못한 고마운 얼굴을 찾아내 보는 것도, 꽤 의미 있는 연습이 될 수 있겠다.
<이수진(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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