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
▶ (53) 한국인의 전통 활 각궁(角弓)
예천의 고 권영구 궁장과 진해의 고 김봉원 궁장, 두 궁장으로부터 각궁 제작 기술을 전수받아 1997년부터 각궁 활을 연평균 100여 개씩 만들어 오고 있는 김광덕 궁장이 완성된 각궁에 활시위를 걸어서 성능을 검사하고 있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김광덕 궁장이 나무판에 재현한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벽화에 나오는 동개궁은 말위에서 사냥하면서 쓰기 편리한 짧은 각궁이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각궁의 막강한 힘의 근원은 소힘줄, 굴참나무, 참나무, 대나무, 물소뿔을 한번 붙여 놓으면 접착력이 좋아 절대 떨어지는 법이 없고 탄력을 받쳐주는 신축성이 좋은 민어(民魚) 부레풀로 접착해서 만든 활에 있다. 각궁을 자른 단면. [Photo ⓒ 2021 Hyungwon Kang]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오수득가정 국궁 연습장에서 김경곤 사두의 활에서 힘차게 발사되는 화살이 과녁을 향하고 있다. 한국인의 전통 궁술인 국궁(國弓)에서는 과녁을 476 피트(145 미터)에 두고 쏜다. 반면 올림픽 경기 양궁에서는 과녁을 70미터 거리에 놓고 쏜다. 세계 양궁대회의 과녁까지 거리는 50미터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오수득가정 국궁 연습장에서 정루시아 궁사가 활을 쏘고 있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오수득가정에서 국궁 연습을 하는 이종표 궁사.
[Photo ⓒ 2021 Hyungwon Kang]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오수득가정 국궁 연습장 바닥에 표시돼 있는 발의 위치. 활을 쏠 때는 총을 쏘듯이 숨을 멈추고 쏜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각궁을 쏠 때 엄지에 끼워 쓰는 숫깍지. 엄지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오수득가정 국궁 연습장에서 궁사들이 과녁에서 화살을 찾아오고 있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시위를 벗은 우리 전통 활 각궁은 쉴 때는 거꾸로 오므라들어서 양 끝이 닿을랑말랑 하는 동그라미를 형태로 복원력을 보인다. 부레풀은 날씨가 추울 때는 접착이 잘 되기에 주로 겨울에 작업을 집중적으로 하고, 완성된 활은 따뜻한 환경에 보관해야만 시위를 걸었을 때 활로서 탄력성을 최상으로 유지한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우리 한국인의 전통무기인 활 뿔 각(角)자 활 궁(弓)자 각궁(角弓)을 만드는 필수 소재로 물소뿔을 사용한다. 물소 한 마리의 뿔 한 쌍이 활 한 자루를 만드는데 쓰인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강한 활을 가진 자가 살아남는다.”
우리 민족이 주변 국가들의 끊임없는 침략 속에서도 수천년 간 국가를 지켜오는 동안 한민족 최고의 호국무기였던 활. 타민족과 각별하게 차별화되는 우리 한국인의 전통무기인 활이 오늘날까지 물소 뿔을 사용해서 만든다고 해서 뿔 각(角)자 활 궁(弓)자 각궁(角弓)으로 전수되어 오고 있다.
고대로부터 활을 잘 다뤄온 민족의 후예답게 예나 21세기 지금이나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남녀 구별 없이 활 잘 쏘기로 유명하다.
1984년 LA 올림픽을 시작으로 이번 도쿄 올림픽까지 양궁 남녀 선수들의 활약은 각별하지만, 특별히 한국 여자선수들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만 빼고 독보적으로 양궁금메달을 싹쓸이 해왔다.
고대 문명부터 산성(山城) 중심의 사회를 건설해온 한국 민족 역사에서 우리의 대표적인 방어무기를 정의하자면 당연히 활이다. 우리를 포함한 동방 민족을 지칭했던 ‘동이(東夷)’라는 말에서 동쪽의 이(夷)라는 글자를 큰 대(大)와 활 궁(弓)자가 합해진 글자라는 해석도 있다.
동이족의 후예인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의 활 쏘는 실력은 여러 문헌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동북공정 이전 중국이 쓴 한국사’의 저자 이기훈 작가에 의하면 발해만 북부의 조선(고조선) 지역은 중국문명 형성의 핵심지역이다.
기원전 28세기에 중원에 내려가 중국 최초의 청동기 문명을 창조한 구려(九黎, 九夷, 고구려의 전신)와, 이후 기원전 16세기 중원 내륙으로 남하하여 중국 최초 공인 왕조를 세운 상나라(은 殷 나라)는 모두 이 지역(고조선 서부)이 기원인 것이 옥기, 청동기, 무덤양식 등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기원전 3세기 이후 구려(九黎, 九夷, 고구려의 전신)는 한반도 고조선 원주민들과 연합하여 한국 문명을 이루는데, 중국 고대 사서에는 이들을 ‘예맥조선’ 또는 ‘조선예맥’이라 일컫는다. 고대 한국민족으로 뿌리를 내린 부여문명을 형성했던 예(濊)족, 중국 한(漢)정권과 수백년 대결했던 고구려 맥(貊)족, 한국 원주민으로 이들과 융합한 조선족이 연합하여 세운 예맥(濊貊)조선의 나라들이 바로 고구려(高句麗), 옥저, 동예(신라), 마한(백제)라고 한다.
고구려인의 활 잘 쏘는 능력은 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 주몽(朱蒙) 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부여태생 고구려의 초대 국왕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신화적인 이야기가 있다.
고구려를 천년 넘게 계승한 고려 때까지 무신정권(武臣政權)에서 지도자급 장수들의 필수적인 활솜씨는 숱하게 기록되었다.
총 이전의 고대 무술과 무기를 비교하자면, 우리는 활, 중국은 창, 일본은 칼로 구분이 된다. 활은 충분한 거리를 두고도 적을 퇴치할 수 있는 훌륭한 무기이다.
넓은 땅을 놔두고, 수천년 동안 오늘날 만리장성 동쪽의 우리 선조들이 있는 땅을 눈독 들인 한족(漢族) 다수 중국 지역의 왕들이 매번 침공할 때마다 번번이 깨진 이유를 들자면 주력 무기였던 우리 활 때문이다.
5년 동안 양자강에서 북경까지 대운하를 612년까지 완성하면서까지 수양제(隋煬帝)가 준비한 고구려 침공은, 다듬어진 돌을 사용한 고구려 축성방식의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지금의 랴오양 시)을 포함해서 단 하나의 고구려 성을 함락하지 못한 방대했던 113만3,800명 대군 병력의 처참한 실패였다.
고구려에서 참패하고 나라를 망하게 한 자기 자신을 “내가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라고 고려고기(高麗古記)에 기록된 수양제(隋煬帝)는 자결할 특혜도 못 누리고 수나라가 618년 멸망하던 때 신하에게 목졸려 살해당했고, 초라한 수양제릉에는 ‘요동에서 일을 벌이다 천하를 잃었다’라고 쓰여 있다.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내쫓고 당(唐 618-907)나라 황제가 된 패륜아 당태종(唐太宗 599-649)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감행한 고구려 원정에서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잃었으며 눈병이 도져 사망했다”고 전해오는 안시성 전투에서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에 깨졌다.
“고구려 원정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 실패를 왜곡해서 축소 기록한 당태종의 중국 실록을 볼 때, 고구려가 단순히 방어 위주의 군사력이 아니라 오늘날 상해 인근의 당나라 깊숙한 지역에서까지 막강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활 궁(弓)자 이름을 가진 우리 역사의 인물 중에는 궁예(弓裔, 869-918)가 있다. 그는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승려가 되었다가 901년에 고려(高麗)를 건국했지만, 918년에 고려의 공식 초대 태조(太祖) 왕건(王建, 877-943)에게 축출되었다.
다른 문명에서도 활은 많지만 우리 전통 각궁 활처럼 작고 가벼우면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우수한 활 자체는 세계적으로도 아주 독특하며 특별하다. 물소 뿔을 깎아서 대나무, 아카시아나무, 그리고 굴참나무 등 3가지 목재와 여러 겹의 소의 힘줄을 한번 붙여놓으면 접착력이 좋아 절대 떨어지는 법이 없고, 탄력을 받쳐주는 신축성이 좋은 민어(民魚) 부레를 녹여 만든 풀 접착제를 가지고 날씨가 차가울 때 시작해서 1년 내내 수공을 거쳐야 완성되는 각궁은 40가닥의 실로 만든 시위를 걸면 비로소 강력한 무기가 된다.
크기가 작은 우리 전통 각궁은 소총처럼 소지하기도 쉽다. 안 쓸 때는 활의 탄력성과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위를 풀어서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는 반대로 뒤집어서 시위를 걸고 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신라시대 때 완도에서 태어난 장보고(張保皐)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고 해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궁복(弓福), 궁파(弓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건국의 아버지 이성계의 활을 쏘는 솜씨는 당대 따를 자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의 영토 요동 지역에 명나라군을 몰아내라는 고려의 제32대 우왕(禑王, 1365-1389) 명령에 불복종하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뒤주에서 굶어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더 유명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 또한 신기에 가까운 활을 쏘았다고 조선실록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의 전통 궁술인 국궁(國弓)에서는 과녁을 476피트(145미터)에 두고 쏜다. 반면에 올림픽 경기 양궁에서는 과녁이 70미터 거리에 놓고 쏜다. 세계 양궁 대회에서는 50미터 거리에 과녁을 놓고 쏜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영웅 이순신장군 또한 신기에 가까운 궁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의 첫 공격 하루 전날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 군함들을 우리 조선군이 바라만보고 그냥 놔뒀다는 소식을 접한 이순신 장군은 “우리가 활로 선제공격을 했더라면 바다에서 왜군을 다 태워버려 임진왜란을 초기 예방할 수 있었다”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우리·문화·역사 Visual History & Culture of Korea 전체 프로젝트 모음은 다음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www.kang.org/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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