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4학년에 올라가면서 반장과 부반장을 새로 뽑게 되었다. 반장 후보 선두주자로는 선생님도 놀라워할 정도로 똑똑했던 동호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한편 일찌감치 선거 운동을 시작한 신옥이는 친구들에게 고무줄이나 연필 등을 나누어 주고 있었고, 신옥이 엄마는 엄마대로 외동딸을 위해 학교를 자주 들락거렸다. 선거에서는 예상대로 동호가 반장, 신옥이가 부반장이 되었다.
동호는 학교 뒷산 움막집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산다는 소문이 있었다. 어느 날 동호는 아마도 어머니가 직접 만드셨을 허름한 삼베 남방셔츠를 입고 왔는데, 하필 그날 전교생 조회가 있어서 그 차림으로 우리반 맨 앞에 나가 섰다. 조회가 끝나자 선생님들 간에 난리가 났다. “아니 어떻게 저런 삼베옷을 입은 아이가 반장이라고 맨 앞에 나가 서있어?” 심지어 다른 반 선생님들까지 번갈아 들어오셔서는 우리들에게 반장을 다시 뽑아야 한다고 설득, 강조, 강요하셨다.
그때 학교를 다녀 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어린 학생들에게 무슨 발언권이나 선택권이 있었겠는가? 결국 우리는 선거를 다시 해야 했다. 아마도 선생님들은 신옥이가 반장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 같은데, 결과는 뜻밖에도 내가 반장으로 뽑혔다. 곤란해진 우리 담임선생님은 공연히 화만 내는데, 옆 반 선생님이 대신 들어와, “아무리 애들이라지만 참 한심들 하다. 두말 말고 신옥이를 반장, 은영이를 부반장 시켜라” 하신다. 동호는 그렇게 반장에서 떨려났다.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똑똑해서 선생님까지 혀를 내두르게 하던 동호는 이 일로 기가 팍 죽어, 그후로는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신옥이도 투표에서 나보다 표가 적게 나왔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 이후로는 나하고 말도 안하고 지냈다.
어른들, 특히 부모나 선생님들은, 아이들은 어려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부당한 처사로 억울하고 분했던 느낌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나도 이럴진대 그때 그렇게 당했던 동호는 어땠을까? 졸업한 후로는 만난 적도 소식을 들은 적도 없지만, 혹시라도 그때의 충격이 너무 오래 가지는 않았을까? 그래도 본래 똑똑하던 애였으니 나름대로 극복하고, 자기만의 멋있는 인생을 살아왔기를 바라 본다. ‘동호야, 그때 우리반 아이들, 모두 다 네 편이었어.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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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전 살렘 한국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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