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청조해진 대기에 깊은 우디 향이 배인 겨울, 큰 바다에서 불어온 안개가 마을을 점령하더니 베란다 창 앞까지 다가와 지그시 나를 바라다본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부지런한 발걸음과 함께 당도한 소식은 연일 세를 키워가는 오미크론의 확산과 치솟는 물가를 보도하고, 급기야 고립과 외로움 속에 유명을 달리한 독거 노인이, 숨진 지 2주만에 발견되었음을 알린다. 아직도 사람은 코로나19라는 긴 터널 속에 있다. 오랜 정체의 기록, 끝 모를 정지 속에서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자와 패딩으로 한기를 막으며 밖을 나선다. 간간이 비치는 불빛을 걸어 마을 어귀로 들어서는 오솔길, 숲이다. 서로의 잎과 가지를 맞대어 길을 내어주는 나무는 숲의 온기를 만들고, 흙 냄새가 살랑이는 향긋한 숨결이 무딘 몸의 감각을 깨운다. 이른 방문에도 싫은 내색없이 차박차박 눈을 뜨는 풀벌레의 기지개 켜는 소리와, 풀잎에 맺힌 이슬이 동그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응시하는 정경. 이 모든 고요한 것이 함께 깨어나는 순간, 숲의 길에선 사람도 그저 하나의 풍경이 된다.
새벽 안개 짙으면 맑다더니, 흰 머플러를 두른 구릉마다 펄럭이는 베일을 걷으며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어느새 빛이 결집된 황금빛 능선의 아플라(aplat, 평면적 색채면 혹은 골격), 무한히 펼쳐진 단색의 아플라는 안개를 가르며 언덕과 골짜기로 퍼지고, 몸 안 가득 햇살을 잉태한 이슬이 찬연하다. 해가 나면 스러지는 덧없음에도 온 존재를 다해 끌어안고 간직하는 맑음의 정수! 이 단순한 숭고함에 자꾸만 끌리는 가슴속으로 하늘이 들어온다. 이슬에 푸른 하늘이 맺혀 있다.
깊은 밤을 가로질러 온 새벽에게 본 것은 이것이다. 깊지도 넓지도 않으면서 맑기에 품을 수 있는 큰 사랑. 어둠이 다가오는 빛으로 소실하듯 역경이 우리 곁을 지날 때 기억하고 연결해야 할 빛은, 가까이 있지만 가깝게 느끼지 못했던 존재들을 향해 작고 미약한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오랜 정체와 정지의 터널, 그 낯선 것들로 다가가기 위해 마음의 등불을 켠다. 이슬에 찬 하늘에 마음을 맞대며, 또다시 삶을 열며, 나는 이 겨울의 새벽을 힘껏 껴안고 있다. 마음을 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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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은씨는 지난 23년 간 방송과 교육, 문화, 공연 예술 등 베이지역 비영리단체에서 봉직해왔으며, 현재 SFIAF와 샌프란시스코 한인문화원, SF 한문협에 적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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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은(SF 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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