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오래 살다 보니 명절을 잊고 살게 된다. 추석 대신 추수감사절로 지내고 설날은 신정에 단출하게 직계만 모여 한끼 식사를 하는 게 일상화 되어버린 지 오래다 .
아이들이 어릴 때는 설날이면 남편이 빳빳한 2불짜리 신권을 준비해 흰 봉투에 넣어 한복을 입고 세배를 하는 두 아들과 친구 딸들에게 세뱃돈도 주었는데 아이들이 장성한 뒤로는 자연스레 이마저도 하지 않고 지나가게 되었다.
내 어린시절엔 주로 음력설을 지냈다. 설날이 오면 장손인 큰댁에 온 식구가 한복을 차려입고 걸어갔는데 큰댁 대문을 열면 명절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여기저기에서 전을 먹음스럽게 부치고, 이것저것 차례 음식을 준비하느라 부엌부터 앞마당까지 분주한 모습이었다. 신이 난 나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어른들이 맛보라고 주는 음식을 받아 먹곤 했다. 원래는 차례 전에 음식을 못 먹게 하는데 어리다는 이유로 나만 특혜(?)를 받았었다.
종친 어르신들이 차례를 지내고 순서대로 3대 어르신들께 절을 하고 나면 차례상은 잔치상으로 변했고 안방, 사랑방, 대청, 툇마루 등에 남자 어르신들 따로, 여자들 따로, 이방 저방에 상을 펴고 앉아 떡국과 설날 음식을 함께 먹었다. 잔칫날마냥 집안이 왈자지껄했고, 음식을 장만하는 여자들의 웃는 소리가 담을 넘었다.
그러고 나면 이제 아이들 차례였다. 세배하고 세뱃돈 받는 시간이 오면 사촌언니, 사촌오빠들, 그리고 나까지 돌아가며 집안 종친 어르신들께 차례로 세배를 드렸다. 어르신들의 덕담과 함께 받은 세뱃돈을 세면 내가 제일 부자여서 내 또래 사촌오빠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그때는 온 세상이 내것 같고 정말 좋았다. 그래서 나는 설날만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그후 5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는 태평양 넘어 북가주에 살고 있다. 내 고향 큰댁의 음력설 쇠는 모습은 먼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때의 풍경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떠올리기만 해도 정겹고 그리운 모습이다. 지금은 밟고 싶은 고향땅이 멀기만 하고, 보고싶은 가족들도 꿈에서나 만날 수 있지만, 엄마가 사준 설빔을 꺼내보고 또 꺼내면서 설날을 기다렸던 그 마음만은 아직 어딘가에 흘러다니고, 마치 어제 일처럼 되살아나곤 한다. 그 옛날만큼 푸짐하고 북적거리는 설날은 아니더라도 우리 손주들과 차례도 지내고 세배도 받고 덕담도 한마디 해주며 세뱃돈도 주는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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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산타크루즈 코리안 아트 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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