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불쌍한 여인이다. “살림 잘하는 김 의원 색시”라고 온 평원군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명석한 엄마는 삽시에 천치가 되어, 부끄러운 엄마로 화인이 찍혔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그 시대엔 없었는지, 그녀의 로맨스는 부끄러운 불륜의 낙인이 찍힌 채 평생 고달픈 멍에를 지고, 누구에게도 떳떳치 못한 삶을 사셨다. 평생 도려내 버리고 싶었던 가슴속의 암 덩어리 같은, 내 어머니의 이야기다.
나는 큰 오빠 외에 세명의 언니 그리고 내 아래로 두 살 터울의 이복 남동생이 있다. 어머니는 유복한 가정의 맏딸로 태어났으나 할머니가 고혈압으로 39세에 쓰러졌고, 43세에 타계하신 후 네 동생의 어머니 역할로 살다가, 18세에 할아버지가 골라준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아버지의 날개 아래 행복했던 어머니의 하늘은 오빠가 14살, 막내인 내가 2살도 되기 전, 평생 남의 병은 다 고치면서 자신의 몸에 생긴 탈은 고치지 못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한순간에 곤두박질을 쳤다. 졸지에 5명의 아이들과 미망인이 된 34세의 어머니, 절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 병원 조수 친구의 위로에 쓰러졌고, 그후 어머니는 평생 그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번엔 우리 다섯의 채무자처럼 치열하게 사셨다.
설상가상 6.25 사변이 터지자 엄마는 어른의 재킷에 이불에서 뜯어 낸 솜을 꾸겨넣어 만든 코트를 우리에게 입히고, 동생은 등에 업은 채, 더러는 걸리며 혹독한 겨울에 피난길을 떠났다. 일사후퇴 때의 눈 덮인 그 피난길처럼, 끝날 것 같지 않던 긴 세월 속에 눈먼 양떼 같은 우리들을 몰고, 엄마는 이북 고향을 떠나 부서진 대동강 다리를 건넜고, 서울에서 부산, 김해, 광주 그리고 또다시 서울로 돌고 돌아 긴 세월을 살아내셨다.
그렇게 우리들은 부끄러운 그 어머니의 희생을 채권자처럼 누리며, 마침내 태평양 건너 미국땅까지 이르렀다. 지금은 더러는 한국에서, 더러는 미국 땅에서 어머니와 오빠 언니들이 앞서고 뒤서며, 순서없이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일생 죄인의 옷을 무겁게 입고 사신 나의 어머니, 그 어머니에 대한 아픈 회한 때문에 그녀가 평생 벗지 못하셨던 무거운 옷을, 지금은 내가 유물처럼 받아 입고 있다. 훌훌 벗어 버릴 수도, 결코 버리고 싶지도 않은, 내 어머니의 집요한 사랑의 옷. 딱 한번이라도, 그 무거운 옷을 어머니의 어깨에서 벗겨 드리고 싶어지는 어머니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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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옥(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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