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읽다 보니 불현듯 빛도 바래지 않은 흑백 사진 한 장이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여고를 갓 졸업한 소녀 두 명이 함박눈을 뒤집어쓴 채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었다. 첫눈 오는 날 남산에서 만나자고 절친과 약속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굳이 그런 약속이 필요 없는 사이였다. 우리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만나서 그녀가 사는 가회동에서 내가 사는 한남동까지 걸어서 왕복할 정도였으니까. 오죽하면 양가 어머니들이 도대체 무슨 얘기가 그리 많으냐고 신기해 할 정도였다. 그녀는 친구이자 자매이며 내게는 언니였다. 그만큼 속이 깊고 이해심도 많아 외동딸로 자라 응석이 심했던 나를 오냐 오냐 받아주었다.
나이가 차서 우리는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중 그녀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떠났다. 서로 사는 게 바빠 연락을 주고 받지 못한 채 이십여 년이 흘렀고, 소설가로 등단하여 미국을 방문했던 나는 기쁨과 기대감에 차서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렇게 이십여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만남이지만 예전처럼 할말이 태산 같고 웃을 일이 많을 줄 알았다. 그러나 각기 다르게 살아 온 세월의 부피에서 오는 이질감이 만만치 않았다. 식후 커피를 주문하는 내게 자기 집에는 아예 커피가 없다며 숭늉을 내놓은 것부터가 그랬다.
나는 딸의 산후 뒷바라지로 미국에 올 때마다 그녀를 만났고 그녀를 모델로 단편 소설을 썼다. 몇 십 년째 미국에 살고 있지만 남편의 완고한 사랑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 미국 속의 조선시대 여인이 의식의 자유를 찾는 주제였다. 너를 모델로 소설 썼어. 작품집을 건네며 말했고 그럼 내 얘기를 먼저 들었어야지, 라는 그녀의 응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을까? 그후 그녀는 일방적으로 내게 절교를 선언했다.
이민 수속을 위해 귀국했던 나는 그녀가 참척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미국에 도착하자 마자 나는 절교를 당한 일도 잊어버리고 통화를 시도했다. 아들을 잃은 아픔도 나누고 나를 멀리 하려는 속내도 듣고 싶었지만 집도 가게도 없는 번호라는 안내만 들었다. 동창들을 통해 수소문하면 그녀의 거처를 알아낼 수 있겠지만 그만두었다.
특정한 인물을 모델로 삼을 경우라도 작가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되고 새로운 인물로 탄생되는 소설의 허구성을 그녀가 알았더라면, 그런 설명을 해줄 기회가 있었더라면 우정이 지속되었을까?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나는 지금도 그녀가 그립다. 건강하게 살고 있는지 안부만이라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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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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