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에 따라 찾아오는 겉모습의 변화는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현상일게다. 문득 젊었을 때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과연 내가 이 같은 모습을 한 적이 있었던가 싶게 가끔은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세월은 우리의 모습을 참으로 많이 변하게 한다. 비록 시간뿐이랴. 인성, 교육, 종교, 환경 등의 영향으로 변화하는 속모습 역시 겉모습에 변화를 준다.
레오나르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릴 때 예수님의 얼굴 모델로서 선하고 한 점 티가 없어 보이는 청년을 선택해 그렸는데, 마지막 배신자 가룟 유다의 모델은 오랫동안 찾지 못해 고생하다가 드디어 사형수 중의 한 사람을 보고서 모델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가 바로 예전 예수의 모델이었다고 다빈치에게 고백하면서 울부짖었다는 내용의 글을 읽었다. 우리의 속모습이 어떠한가에 따라 겉모습이 결정될 수 있다는 한 예(例)이다.
속사람과 겉사람과의 갈등은 존재할까? 당연하다. 지위에 따른 혹은 삶의 정황에 따른 속사람과 겉사람 모습의 갈등은 엄연하다. 그 둘의 모습이 일치하고픈 소원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실제 우리의 속모습은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겉모습과 갈등을 일으키며 우리로 하여금 번뇌하게 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던간에 말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외친 사도 바울처럼 우리 안에 있는 선(善)과 악(惡)의 공존을 누가 부인할까. 속사람과 겉사람의 관계는 얼만큼 인내하며 성숙한 인간으로 변하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날 듯하다. 우리 속사람을 가다듬어 멋진 겉사람으로의 변화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게 중요한 삶의 방향일 터이다.
그런데 막상 나이가 들어 이제 삶을 정리할 시기가 되었을 때의 겉모습과 속모습은 어떠할까. 도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듯한 양로원 어르신들의 겉모습과 속모습은 갈등없이 단순해 보인다. 헤어컷을 하고난 후 “어머나 예뻐졌네”라는 말을 하면 너도 나도 머리를 자르겠다고 줄을 서고, 손을 잡고 얼굴을 만져주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만져달라고 한다. 사랑과 관심이 그리운 본능이다. 노인들만 그럴까? 아니, 우리 인간은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고 또 표현하는게 자연스럽다. 그에게 관심을 표하고, 나의 애정을 고운 말에 담아 손길을 내밀어 맞닿으면 사랑은 피어난다. 그래서 속사람과 겉사람의 갈등을 넘어서는 것은 결국 나를 포함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겠구나 싶다.
<스테이시 김(사회복지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