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한글학교 숙제를 읽어보다가 괴발개발 써놓은 아이의 글씨를 발견했다.
“아니 글씨를 이렇게 써놓으면 어떻게 해? 알아볼 수가 없네.”
“나는 다 알아볼 수 있어. 괜찮아.”
아이의 대답에 기가 막혔다. 언어의 전제조건은 소통이 아니었던가? 네가 쓴 것을 내가 못 읽겠다는데 괜찮다니! 하나하나 일일이 고쳐주고 싶었지만 마음에만 담아 두고 일단 멈췄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우리 가족은 유럽 여행을 떠났다. 로마 공항에서부터 시작된 낯선 언어들의 향연에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커다란 수화물을 네 개나 챙겨 들고 한밤중에 길 찾기에 나서자 눈이 뒤통수에도 달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을 뼈저리게 느꼈다. 입구와 출구를 혼동하여 몇 차례 같은 길목에서 오가던 중 내가 불평했다.
“아니 똑바로 써 있는 글씨를 보는데도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나는 쫌 알 것 같은데. Ài treni는 To trains고 Usita가 Exit 아니야?”
나는 알아보지 못한 것을 아이는 말랑말랑한 사고로 해석해 냈다. 심지어 이탈리아어를 실감 나게 잘 읽는다! 공항에서 내려 기차로 갈아타는 과정 중 아이는 안내방송을 귀담아듣고, 표지판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만의 답을 찾은 것이다. 반면에 나는 어땠나? 손에 보물처럼 꼭 쥔 핸드폰 속 지도만을 맹신하며 내 주변에 수놓아진 길 찾기 단서들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지난 3월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 님과 인터뷰를 하며 ‘시나브로’라는 말을 처음 구두로 듣게 되었었다. 이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을 품은 순우리말로 당시의 나는 ‘시나브로 무언가를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환경을 백분 활용하자’는 다짐했었다. 그런데 나 좀 보소. 시나브로 이탈리아어를 배울 수 있는 환경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낯선 불편함에 배움의 기회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이의 모국어 습득 과정 중 읽기와 쓰기는 듣기와 말하기 다음에 등장한다. 어린이는 자신의 신체가 자라나는 속도에 맞는 방법으로 언어를 습득하기 때문이다. 듣기와 말하기를 우선시하는 이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시나브로 익힐 수 있고 체화된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신체가 다 자라 빠른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성인의 언어습득은 읽기와 쓰기를 우선시한다. 이 방법은 빠르게 배운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는 장점 이외에는 특이점이 없다. 시나브로 익힌 모국어가 너무 익숙해서 그것을 몰랐던 적이 없던 때를 기억 못 하는 내가 자라나는 아이에게 읽기와 쓰기에 대해 훈계를 두는 것이 맞는 걸까? 아차 싶었던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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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정(테이크루트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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