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뉴욕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던 보통날의 저녁, 좌석에 앉아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눈을 들어 맞은편 좌석을 바라보게 되었다. 4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백인 여성이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가방과 자신의 몸을 꽉 끌어안은 채,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조용히 삼키려 애쓰지만 그럼에도 비집고 나오는 눈물방울들이 볼을 타고 흐르는 모습에 내 마음도 미어져 갔다. 그때만큼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도 모르게 낯선 그 분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프게 울고 있는 그녀의 마음에 내 마음도 공명이 되어 온갖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왜 혼자 저렇게 서글프게 울고 있을까? 아주 가까운 누군가의 품에서 흘려야만 할 것 같은 서러운 눈물을, 왜 이 사람은 혼자 감당하겠다는 초연한 느낌을 풍기며 홀로 저렇게 흘리고 있는 걸까? 소중한 무엇인가를 상실한 걸까?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건강상의 이유 같은 것이었을까? 가까운 이에게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당연히 나는 이유를 묻지 못했고, 그저 전해진 아픈 마음을 같이 느낄 뿐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이런 마음을 느꼈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하철이 내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을 때, 또 다른 중년 여성분이 그 분에게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고는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그 마음 다 이해한다는 듯 그저 조용히 건네진 손수건이었다. 이에 서글프게 울고 있던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이것은 내 마음을 한결 나아지게 만들었다.
무엇이 좋은 위로일까에 대해 몇 년 전부터 생각해 오고 있다. 부모님의 말기 암 소식을 들은 사람에게, 하루아침에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일상을 살 수가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자녀를 잃은 사람에게, 삶에 아무런 의욕도 없는 사람에게 어떤 위로를 해야 그것이 정말 그 사람을 위하는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일의 원인이나 시기 등 상황이 다 다르기에 위로의 모범답안이 단 하나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좋은 위로 중 하나는 그 고통의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괜찮아질 것이라는 어떤 긍정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나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질문을 퍼붓는 그런 결례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같은 마음으로 그 시간을 “함께” 견디어 주는 것.
가방에 넣고 다니기 위해 손수건을 한 장 샀다. 혹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를 슬프게 우는 어떤 한 사람을 위해. 그리고 좋은 위로에 대해 상기 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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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나(UX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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