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아들의 자랑은 눈감고 OO하기였다. 눈감고 한글 쓰기, 눈감고 신발 끈 묶기 등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눈을 감는다고는 하지만 실눈을 뜬 뒤 애써 안 본 척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또 어린이다움 덕분에 뿜어져 나오는 그 순수함이 참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 감고 OO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한 개인의 ‘성장’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바라보기 좋았다.
문제는 눈감고 OO 하기가 ‘눈 가리고 아웅 하기’로 변했을 때다. ‘다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을 하다’는 뜻을 가진 이 속담이 경고하는 바는 익숙함의 역기능, 즉 성장의 멈춤이 아닐까 싶다. 내 아이는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미국 땅에서 자라며 이중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부모님과의 대화 중 예의를 차려야 할 때면 ‘나는 한국말을 잘 못하니까’라는 핑계를 둘러댄다. 눈감고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만큼 존댓말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해 주었는데도 아이는 매번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짧은 존댓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나는 매번 화가 난다.
내가 아이에게 화가 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지 그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음악 경연대회에 나갔는데 불편한 옷을 입고, 낯선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이 싫어서 나 몰라라 도망가려 했었다. 그러나 경연장에선 내 옷에 뾰족한 핀으로 번호표를 꽂아 놓은 뒤 도망갈 틈을 주지 않았고, 내 연주 차례에는 이름 대신 번호가 불렸다. 당시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무대로 걸어 나가 피아노 의자에는 앉았으나 결국 첫 음을 찾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연주할 수 있는 만발의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 뒤 나는 그 누구보다 나에게 혹독한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고 있다’는 그 마음이 완벽을 갈망하는 나를 무너뜨리기도 했지만 때론 내 삶에 찾아오는 불편함과 낯섦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의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사실 일찍 피아니스트의 길에 들어선 나에겐 눈감고 연주하기는 자랑이라기보단 삶의 기본값이다. 덜 익은 연주를 알아챈 청중에게 ‘눈 가리고 아웅 하기’식 변명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내가 아이에게 화가 난 이유가 분명해졌다. 나는 ‘원래 못해’라는 마음을 품고 의도적으로 성장을 멈춘 아이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노력의 기준을 내 맘대로 세워 놓고 그 잣대를 휘두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아야겠지만 자라나는 아이가 이것만은 기억하고 실천했으면 좋겠다.
나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한 책임감이라는 것을. 그러니 성장하는 것을 멈추지 말기를.
<
안미정(테이크루트 CEO)>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