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는 말년에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심취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밤낮없이 이 책을 읽은 듯하다. 조선왕조실록 1769년(영조 45년) 2월 17일 자에는 “임금이 말하기를, 이종영을 처분한 하교를 정관정요를 보고 고쳤는데, 독서의 효험이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5월 7일 자에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정관정요를 읽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정관정요로 인하여 강개(慷慨)해졌다”고 적고 있다.
■정관정요는 중국 당 태종과 신하들의 대화를 엮은 책이다. 태종은 우리에겐 침략자이지만, 중국에서는 성군으로 통한다. 이 책에는 군주의 도리, 인재 등용, 간언의 중요성 등이 담겼다. 태종 사후 40년 뒤 발간된 이 책은 이후 중국은 물론, 고려·조선, 일본 등 동양에서는 제왕학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에서는 과거 시험의 필수 도서였으며 일본에서도 지도층의 필독서였다.
■이 책에 태종만큼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위징(魏徵·580~643년)이다. 영조도 정관정요 언급 때마다 위징을 빼놓지 않았고, 행동강령을 위징의 관점에 맞췄다. 신하들이 큰 잔치를 준비하자 “위징이라면 잔치를 말렸을 것”이라고 거부한다. 위징은 창업보다 수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태종에게 최고 권력의 자리를 두려워하며 늘 삼갈 것을 간언했다. 고구려 원정(645년)에 패한 뒤 “위징이 있다면, 반드시 말렸을 것”이라고 한탄했을 정도로 태종은 위징에 의지했다.
■위징은 당 태종 이세민과 권력 다툼을 벌이던 이건성의 참모였다. 이세민에 대한 독살 계획을 건의했을 정도다. 태종은 권력을 잡은 뒤, 죽임을 기다리던 위징을 포용했고 선정의 도구로 삼았다. 역대 위대한 통치자는 과거 정적의 인재를 중용했다. 관중을 선택한 제 환공이 그랬고, 당 현종도 아부하는 소숭 대신 대쪽 같은 한휴를 발탁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그래야 한다. 출산율 제고, K방산, K원전 등 전 정권에서 성과가 난 분야를 살필 필요가 있다. 내 사람이 아니었던 이를 골라서 활용하는 과정은 힘들겠지만, 대통령이 여위는 만큼 나라는 살찐다.
<조철환 / 한국일보 오피니언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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