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며 신실한 기독교 교인인 김규식(1881-1950)선생을 기리기 위해 모교인 버지니아 로녹대에 세워진 ‘김규식 한국학 센터'가 다음 달에 개관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이 센터는 1890년대부터 본 대학과 한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바탕으로 “교육, 연구, 역사 보존 등의 허브 역할과 학생과 교수 간 교류를 촉진하는 플랫폼이 될것이라는 한다.” 이 대학은 1842년 루터교 계통에서 세운 기독교 선교대학으로 학생입학에 기독교 정신에 따라 인종차별을 두지 않았던 대학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인디언, 히스패닉, 동양인, 흑인 등 소수 인종의 학생들을 많이 받아들였다.
이런 입학정책에 따라 여러 한국인 유학생들도 이 대학에서 130여년 전에 공부하게되었다. 1894년 한국인 유학생 서병규가 학부에 입학, 4년 후 1898년 문학사 학위를 받고 첫 입학생인 동시에 졸업생이 됐다. 그는 귀국하여 여러 관직을 맡았다. 김규식 그리고 대한제국 의친왕 이강이 1900년 입학, 1903년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외교관 이범진의 아들 1907년, 한국 최초 타자기 발명자 이원익은 1914년 입학했다. 당시 주미공사 서광범은 명예법학석사를 받았다. 개교한 해인 1894년부터 일정강점기가 시작되던 1935년 사이에 35명의 한국 유학생이 공부했다.
부모를 잃고 네살에 고아가 된 김규식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 경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으며 언더우드학당을 다니며 신앙심을 키우고 영어를 배우며 소년기를 보냈다. 1894년 3월 한성관립영어학교(교장 영국인 허치슨(W.F. Hutchison) 선교사)를 졸업했다. 그 후 김규식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를 맡아 그의 선교활동을 도와주었으며, 선교 학교(mison school) 경신학교 교수와 학감을 지내는 중 언더우드 선교사의 추천으로 로녹대로 유학을 갔다.
김규식 선생 처럼 구한말(1897-1910) 재미 유학생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분들은 기독교인들이다. 서재필 이승만 등이 좋은 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고있던 서재필(1864-1951)선생은 1985년 조선에 선교사 파송을 준비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박영호, 서광범과 함께 화물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망명을 했다.
미국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의 소개로 이곳에 거처를 구한 서재필은 감리교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교인 홀랜백(J. W. Holleback)의 소개로 1886년 펜실바니아 윌크스 배리(Wilke-Barre)에 있는 해리 힐만 고등학교(Harry Hilman Academy)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1889년 워싱턴 D.C.의 콜롬비안 대학(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 워싱턴 대학)입학, 1893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의 의사면허를 받았다. 그리고 1890년 10월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됐다. 그는 1894년 가정교사로 가르쳤던 철도국장 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Muriel Mary Armstrong)와의 결혼식을 자신이 주일 예배를 드려왔던 워싱턴 D.C. 커버넌드 교회에서 올렸다.
서재필은 1896년 귀국하여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순 한글과 영어로 발간했다. 고국에 머무는 동안 언더우드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는 언더우드학당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리고 이상재 윤치호, 남궁억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시민단체 ‘독립협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 서재필은 1896년 배재학당에 무료로 출강하여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주주의 체재를 강의했다.
그의 학생가운데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 등 당시 지식층 청년들이 강의를 들었다. 1898년 미국으로 돌아 온 서재필은 필라델피아 대학 해부학 강사로, 펜실바니아 대학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1910년 한일합방 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951년 1월 15일 8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장레식은 필라델피아 메디아 교회에서 진행됐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박사는 20세 1895년 4월 2일에 아펜젤라 선교사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양 학문을 공부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알게됐다. 특히 이승만은 1896년 5월 이 학교에서 강사로 가르치고 있던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영어공부는 물론 독립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1897년 7월 8일 감리교회인 정동교회에서 진행된 졸업식에서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영어연설를 하여 주한 외국 사절, 정무 고관을 비롯한 청중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일어난 박영호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채포되어, 종신형을 받은 그는 1904년 8월 9일 석방될 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기독교 신앙의 큰 전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투옥 중 영어성경을 통독하고 한영사전을 정리했다.
그는 이상재, 홍재기, 유성준 등 전직 고관과 지식인 등 40여 명의 죄수들, 10여 명의 간수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했다. 석방 후 1904년 10월 남대문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을 교장직을 맡아 청년들에게 신앙심을 심어주던 이승만은 1904년 11월 4일 미국으로 출국, 같은 해 12월 31일 미국 수도 워싱턴에 도착했다.
1905년 2월 조지 워싱턴대학 2년생으로 입학, 1907년 6월 졸업한 이승만은 같은 해 4월 23일 이 도시에 있는 커버넌트 장로교회에서 루이스 햄린 목사로 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1910년 하바드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기 전 1908년 9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시작하여 1910년 7월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 생활 5년 11개월만인 1910년 10월 귀국,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겸 학감으로 교육과 기독교 전도 활동에 열심을 다 했다. 그리고 1년 5개월의 고국 생활을 마감하고 1912년 3월 다시 미국 망명길에 올라, 1913년 2월 하와이에 정착하면서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 교장직과 한인기교학원(KIC) 원장직을 맡아 기독교 선교에 앞장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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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종욱 전 한동대 교수 사회학박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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