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계 카니 리앵(17세)은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다. 흑인계 루이슨튼(20세)은 같은 학교 중퇴생이었다. 이 두 젊은이들은 서로가 사랑하고 있었다. 카니의 부모는 학교 성적이 우수했던 딸이 얼마 전부터 학교를 결석한다는 통고를 받는다. 두 사람의 관계 때문임을 알게 된 부모는 심한 충격에 빠진다. 부모와 딸과의 언쟁, 그리고 이로 인한 가정불화는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홍콩에서 이민온 그들은 맨하탄 중국식당에서 일하면서 힘겹게 살고 있었다.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이민 초기의 삶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지난주 어느날 밤 7시, 아버지는 예나 다름없이 집에 돌아왔고 텔레비전을 보며 하루의 피로를 달래고 있었다.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이 둘은 레인코트 허리띠로 아버지의 목을 졸라 죽인다. 그리고 그들은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 10시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같은 방법으로 목졸라 죽인다. 그들은 두 시체를 침대에 눕힌 채 문을 잠그고 도망친다. 그리고 부모의 금패물을 전당포에 잡히고 돈(약 5,000달러)을 마련한다.
며칠 후 이 둘은 사체 처리를 궁리했다. 먼저 어머니를 샤핑 카트에 싣고 맨하탄과 퀸즈 사이를 흐르는 이스트강에 버린다. 그리고 이어 아버지를 세탁용 포대에 싸서 같은 장소에 버린다. 약 2주 후 친척은 경찰에 실종자 신고를 했고 그러던 중 아버지의 시체가 물위에 떠오른다. 경찰은 수사 끝에 이 둘을 살인혐의자로 지목했고 범행 전모를 자백 받는다.
지난달 뉴욕타임스를 비롯 언론들은 모진 사회의 근친살해 사건을 연일 보도한다. 경찰은 이 사건을 혐오성 인종갈등이라 보는 모양이었다. 수사관의 심문 중 카니에게 후회하느냐 묻는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마디 “노” 뿐이다.
생전시 어머니는 둘의 관계를 이해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나 루이슨튼은 “문화적 차이를 어떻게 빨리 이해할 수 있는가” 하며 뉘우침이 없다.
어떻게 오늘날 이 세상에 이와같은 처참한 비극이? 이 말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풋내기 사랑이 저지른 비극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 또 있으랴. 그러면서도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다는 ‘악’이 이 세상에 만연되어 가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톨스토이는 인간의 야수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한 여자는 사랑하는 남편을 꽃 속에 숨은 독사가 되기를 유도한다”.
그는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처절했다는 맥베스(Macbeth)에서 살인의 극악성을 이렇게 쓰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는 맥베스는 저승의 생명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충성을 맹세했던 왕을 비참하게 죽인다. 남편의 손에 물들인 피를 보고 “피는 물에 씻으면 되는 것”이라고 타이른다. 양심과 앙심의 싸움에서 앙심이 이긴다. 내일이 없다던 그들은 “내일이 그리고 내일이” 이렇게 중얼거리며 죽어간다. 톨스토이는 이를 악마의 속삭임이라며 끝을 맺는다.
카니도 루이슨튼도 악마의 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악마는 어디서 와서 누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 인간의 ‘생명 경시 풍조’라는 역사 속에 점철된 사건들,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책임을 물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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