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링컨센터에서 북한 음악가들의 공연이 있었다. 김일성 주석이 좋아하던 ‘사향가’가 연주되고 ‘정일봉의 우뢰 소리’가 불려졌다.
마치 메트로폴리탄 공연 중 보고싶은 것을 골라서 가듯이 이날 자연스레 모여든 8백여명의 한인들은 북한의 개량악기와 발성법이 친숙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공연을 즐긴 듯이 보인다.
공연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에 지난 95년 여름, 취재 차 간 통일음악회에서 본 한 노인의 모습이 자꾸 걸렸다.
광복 50주년 기념 행사로 열린 그 음악회에는 평양의 성악가와 민요가수, 뉴욕의 성악가와 필라 거주 가수, 모두 4명이 한 무대에 서서 ‘고향의 봄’과 ‘반달’을 부르기도 했다. 객석에는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들이 많았는데, 공연 전 ‘이런 곳에 와도 될까?’ 하던 실향민들은 화해와 통일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저마다 가슴속에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통일이 될 것입니다. 생활 속에 통일을 염원하며 살아갑시다”는 출연진의 높은 목소리로 행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사진을 찍다가 객석 뒤에 서있는 한 노인을 발견했다.
자손들 몰래 왔는지, 원래 가족이 없는지, 무대에 시선을 못박은 뒤 이가 다 빠진 입을 벌리고 서있던 그 70대 노인. 공연 후 북한 출연진들이 앞에 앉은 한인들과 포옹을 하자 그 노인은 비척비척 힘든 걸음걸이로 무대 앞으로 나갔다. 말없이 북한 여가수를 한번 부둥켜안고 홀연 돌아서 나오는데 그 얼굴이 너무 슬퍼서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검버섯이 피고 메마른 얼굴에 딱 벌린 입, 그 벌린 입안의 목구멍이 시커먼 동굴처럼 느껴졌고 이산가족의 슬픔과 외로움, 깜깜 절벽의 절망과 회한으로 받아들여졌었다.
이날 그 노인을 만났다면 금방 알아보았겠지만 아마 그 노인은 모진 세월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분명 세상은 달라졌다.
6년 전 북한 가수가 뉴욕무대에서 가사를 일부 바꿔 부를 정도로 조심스레 불렀던 북한가요 ‘휘파람’은 뉴욕 한국서점에서 테이프와 CD가 거리낌없이 팔릴 정도이다.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 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잡은 순간부터 남북 화해무드는 달아오르기 시작, 극소수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고 이러한 북한 특수는 뉴욕까지 건너온 것이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 관계는 남아있고 한인들이 사업차 북한에 가면서 어딜 간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싶고 먹지 말라면 더 먹고싶듯이, 금단의 땅이었으므로 더욱 가고싶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군중심리에 휩쓸리지는 말아야 한다. 이날, 북한정권의 찬양 노래에 일부 한인 여성들이 ‘브라보’를 외치며 앞장서 기립 박수를 유도하는 것을 보았다. 과잉친절이나 과잉환대는 하는 쪽도 계속 하기 힘들고 받는 쪽도 부담스럽다.
뉴욕은 도시 자체의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온갖 바람이 다 몰려든다. 하지만 자신이 세운 원칙을 지키고 있으면 어떤 폭풍도 미풍처럼 지나간다. 도도하게 밀려오는 물결을 피할 수는 없지만 확고한 무게 중심이 있으면 그것은 자연스레 흘러간다.
순수한 인류애로 북한을 대하는 사람들을 색안경 끼고 보는 극우파도, 초면에 만난 사람에게 대뜸 “조국(?)에 한번 다녀오셔 야지요”하는 충성파도 자신이 너무 넘치게 행동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았으면 한다.
6년 전의 음악회와 최근의 음악회 풍경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노인의 슬픔을 가슴 밑바닥에 공감하고 있으면 우리가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할지, 내가 어떤 자리에 서야할 지 명백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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