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 9월 파리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영국과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워싱턴장군의 개선군이 뉴욕시에 입성하여 살아남은 지휘관들과 해산을 앞둔 석별의 만찬이 열렸다. “전우 여러분, 큰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영광과 명예로 넘쳐흘렀듯이 앞으로도 행복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인사말을 마친 후 싸움터에서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들과 악수하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버지니아 마운트 버논에서 큰 농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대학 진학에는 관심이 없어 일찌기 영국군 장교로써 프랑스군과의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독립전쟁을 위한 대륙군 사령관에 임명된 후에는 독립을 위해 영국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군대를 모집하고 훈련하는 기관은 미비했고 더구나 당대 세계 최강의 영국과 싸워야 하는 식민지에는 왕당파와 애국파로 갈라져 대내외적으로 싸워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프랭클린의 외교로 프랑스 군대가 직접 참전은 안했으나 원조를 얻는데 성공한 것이 그를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12월 23일 대륙회의에서 워싱턴장군의 고별인사가 있었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완료했습니다. 훌륭하고 기대했던 부대에서 물러나려 합니다. 본인은 오래동안 대륙회의 명령 밑에서 일해왔습니다. 위엄이 넘치는 대륙회의에 존경의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드리며 임명장을 반납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그리고 한 개인의 몸으로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1789년 1월 총선거가 실시되어 연방의회가 구성되고 선거인들은 뉴욕에 모여 워싱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4월 30일 다운타운 월가의 연방홀에서 초대대통령 취임선서를 함으로써 미합중국 정부가 정식 출범했다. 군인으로 봉사할 때 같이 성실히 임무를 수행한 그는 논란이 일었던 호칭에 ‘각하’보다 ‘합중국 대통령’으로서 만족해 했다.
말년에 당파에 초연하려 했고 늘 생각하던 은퇴를 결심하여 3차임기를 위해 출마치 않을 것을 분명히 밝혀 2차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전통을 세운 양식있는 정치가가 되었다.
역사가의 평판은 달라도 그는 합중국 단결의 구심점이었으며 군인으로써 뿐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뛰어난 안목이 있어 임무완성 후 명예롭게 은퇴하여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것을 볼 때 임무수행과정과 백악관을 통째로 들고 할렘으로 퇴임하는 클린턴의 도덕관은 무척 이색적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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