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역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잘 갖춰져 있다. 운동 삼아 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다리가 아프거나 걷기 싫으면 에스컬레이터에 의지하면 된다. 원래 에스컬레이터는 가만히 서 있으면 저절로 목적지까지 인도하는 기계다. 그러나 서울 지하철역에서는 그저 멍하니 서 있으면 간혹 바보 취급당한다.
에스컬레이터에 탄 채 서 있으면 뒷사람들이 퉁명스럽게 몸과 옷을 스치면서 앞질러 간다. 어떤 사람은 앞질러 가면서 다시 뒤를 힐끔 쳐다보며 "바쁜데 멍청하게 왜 길 한가운데서 통행을 막고 서 있어"하는 눈치다. 유난히 폭이 좁은 에스컬레이터지만 여기에도 ‘급행로’와 ‘완행로’가 있었던 것이다. 에스컬레이터에 조용히 서 있을 사람들은 오른쪽의 완행로를,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또 다시 걷는 급행로를 이용하게 돼 있다.
에스컬레이터 타는 지점에 작은 글씨로 이런 사용법이 적시돼 있다. 그래봐야 급행로가 완행로보다 몇 초 정도 빠를 터인데 뭐가 그리 급한지 너도나도 급행로를 이용한다. 정 화급한 일이 있으면 옆에 있는 넓은 계단을 빨리 뛰어 올라가면 될텐데 굳이 비좁은 에스컬레이터를 둘로 갈라 거기서 속도경쟁을 벌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경쟁을 즐기는 듯한 인상마저 든다.
한국인들은 ‘빨리 빨리’가 몸에 배어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라지만 이젠 ‘제2의 유전자’로 자리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밥 먹는 것도, 운전하는 것도, 일하는 것도 ‘속도 싸움’이다. 진정으로 바쁜 측면도 있겠지만 무엇이든 느리게 하면 남들에 뒤쳐진다는 강박관념이 보다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한 시민단체가 최근 ‘느리게 살기 운동’을 전개해 한 때 잔잔한 파장을 던지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에스컬레이터의 급행로는 ‘조급 문화’를 한결 더 자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편리를 도모하기 위함이라지만 한국인의 ‘빨리 빨리’를 정부가 앞장서서 자극하는 셈이니 말이다.
국제 투명성기구가 최근 발표한 ‘2002 뇌물공여지수’에서 한국이 21개 주요 수출국 가운데 국제교역에서 뇌물 제공 가능성이 네 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상 템포를 벗어나면 무리가 따르고 무엇이든 남보다 빨리 하려다 보면 부정을 저지를 수 있다. ‘뇌물 공화국’이란 오명도 한국인의 조급 문화에서 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조급 문화를 조장하는 듯한 에스컬레이터 운용 방침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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