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애자씨는 6남매 중 셋째인 염동년씨와 결혼을 했다. 결혼직후 남편은 군대를 갔다. 남편이 군을 제대하던 날 ‘이제 고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이 제대하자마자 미리 미국에 가 있던 형제들의 부름을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함께 떠나지는 못하고 자녀는 어느덧 네명, 떠나간 남편과 8년 간을 떨어져 지내야 했다. 당연히 한국에 남은 시할머니와 시어머니 봉양, 자녀 키우기는 염애자 씨의 몫이었다.
최근 한인회 주최 가정의 달 동포상 시상식에서 효행상을 수상한 염애자(사진)씨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눈물이 글썽이는 모습이었다.
그 눈물은 그러나 여태까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잘 지내온 시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지 결코 고통스러웠던 날들의 보상을 생각하며 서러움에 복받쳐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다.
시상식에서도 염씨는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렇게 상까지 받게 되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지난날을 생각해 봐도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과 떨어져 있는 동안 시할머니는 중풍으로 몸져누워 계시고 시어머니마저 위장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 계셨을 때는 “약 사발, 죽 사발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병간호에 전념해야 했었다”며 육체적으로는 어려운 시기도 있었음을 회고했다. 89년, 염씨의 시댁 식구들을 비롯 온 가족이 시카고 인근 다우너스 그로브 지역에 정착하게 됐지만 이제는 시어머니도 염씨를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 시어머니 봉양은 여전히 염씨의 몫이다. 요즘엔 시어머니가 치매증세를 보이고 있어 염씨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글쎄요, 이제 제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부디 시어머니께서 몸 건강히 오래 사시는 것이지요. 또 여전히 좋은 며느리로서 역할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구요.” 염씨는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도리를 지킴으로써“ 본인의 자식들에게도 부끄럽지 않는 엄마가 되기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끝을 맺었다.
박웅진 기자
jinworld@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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