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전미 한인상의 주도
하와이서 출생, LA정착 비즈니스
신한민보 영문판 발행에도 참여
본격 이민행렬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1950년대에 LA에서 전미한인상공회의소(Korean Chamber of Commerce of America)가 조직됐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 거의 없다. LA를 비롯해 뉴욕, 시카고, 펜실베니아 지역의 한인 15∼20명이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 단체는 다운타운 샌퍼난도 빌딩 8층에 사무실을 얻고, 4∼5차례 미 전역에 소식지를 배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지금 이같은 증언을 해주고 있는 사람은 당시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했던 초기 이민자 2세 존 한(86)씨.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가 초대 회장을 역임한 이 전미한인상공회의소를 기억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이같은 경력으로 한씨는 초창기 한인 커뮤니티 경제계의 산 증인으로 꼽을 수 있다.
한씨는 “한미 양국의 무역증진을 위해 상공회의소를 창립하고, 미 전역에 네트워크를 구성하려 했지만 당시 한인의 경제력으로는 역부족이어서 2년여 동안 활동한 뒤 해체됐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1906년 하와이에 도착한 한제명 씨와 10년 뒤 건너 온 김수경씨의 외동아들인 한씨는 1918년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인삼장사와 경비원 일을 한 부친을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한씨는는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료들은 피지를 거쳐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오가며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인삼을 판매했다”고 회고했다.
대공황을 피해 1932년 LA로 이주한 한씨는 LA 아담스 주니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인쇄계통의 일을 시작했다. 1940∼50년대 LA타임스와 데일리 뉴스 등에서 인쇄공으로 근무한 그는 상공회의소 활동과 함께 신한민보 영문판 발행에도 깊숙이 참여했다고 한다.
1942년부터 신한민보 영문판 일을 돕기 시작한 한씨는 당시 영문판을 책임졌던 안수산 여사가 해군에 입대하자, 그 뒤를 이어 영문판 제작을 총괄했다. 한씨는 “낮에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밤이면 국민회관에 나가 신한민보를 만들었다”며 “힘들었지만 미 전역으로 신문이 배달되는 것을 볼 때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1950년대 초까지 신한민보에서 활동했다고 기억했다.
1962년 워싱턴가에서 ‘Koreana Gifts and Arts’라는 한국전통상품 도매점을 시작한 한씨는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부인 케티 한씨와 함께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다만 한인타운의 북상과 함께 가게 위치만 워싱턴에서 올림픽을 거쳐 윌셔가로 옮겼을 뿐이다. 그는 “한 때는 미 전역에 한국 관련상품을 공급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소일거리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년시절 신한민보와 한인상공회의소를 통해 한인사회의 힘을 키우고자 헌신했던 한씨는 한인타운 한복판에서 몰라보게 성장한 한인사회를 지켜보며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의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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