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방문을 열자 망고향 헤어젤 냄새가 훅하니 끼쳐왔다. 침대 위아래로 똬리를 틀어 벗어놓은 바지들이 서너 개, 셔츠만 해도 족히 여남은 장이 사방에 널려져 있었다. 씻는 걸 죽는 일 다음으로 싫어하던 아들녀석이 6학년이 되자 부쩍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샤워시간이 길어진 건 물론이요, 혹 책가방이라면 몰라도 머리에 젤 바르는 걸 잊은 채 등교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아이는 식탁에서 미영이 얘기를 하느라 제 양도 못 채우고 허겁지겁 서둘러 뛰어나갔다.
나는 한 때나마 남편에게 저런 열정을 품어보았는가? 너 김서방 홀대하면 천벌 받는다. 제 식구 그만큼 끔찍이 위하는 남자가 어디 흔한 줄 아냐? 굳이 무시로 내게 오금을 박는 친정어머니가 아니더라도 나 역시 그가 헌신적인 남편이요 가장이라는 걸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첫 만남만큼이나 지금의 결혼생활 또한 어쩐지 허구 같기만 한 걸 어쩌랴.
가난한 운동권 학생과 중산층의 음대생… 꼬박 삼 년을 이어온 H선배와의 만남은 두 사람의 불확실한 미래 때문인지 곧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날도 역시 그랬다. 거의 한 달만에 만난 우리는 애틋한 포옹 끝에 피차의 손을 꼭 잡았지만 곧이어 익숙한 침묵이 끼어 들었다. 그 서먹함을 숨기려는 듯 우리는 서둘러 혼잡한 인천행 전철을 탔다.
지금의 남편을 우연히 만난 건 바로 연안부두에서였다. 그는 과장된 반가움으로 고교동창인 H의 어깨를 치고 세 사람은 어찌어찌 횟집까지 동행했다. 군 복부를 마치고 어느 지방대학에 학적만 걸쳐둔 채 일찍이 사업에 뛰어 든 그는 선적 관계로 인천을 자주 드나든다고 했다.
헤어질 때 연락처를 달라는 그에게 H는 내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그때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곧 수배에 들어가리라는 걸 알았다. 혹시 저 녀석한테 연락이 오면 적당히 둘러대. 나는 저런 인간형들을 참을 수 없거든. 머리는 텅 비어가지고 비상하게 생존능력만 발달된 치들이지. 그나저나 저 녀석 학교 때 별명이 뭔지 알아? ‘철호의 찬스’야. 언젠가 철호의 찬스라고 잘못 말하는 걸 제 짝이 고쳐주려니까 굳이 철호의 찬스가 맞는다고 빡빡 우기는 거야. 제 놈이 읽는 축구만화의 주인공 철호가 상대선수 서너 명에게 철통 마크를 당하면서도 센터링으로 넘겨준 볼을 기가 막히게 골인 시켰다나. 절호의 찬스, 아니 철호의 찬스라는 표현이 바로 거기서 유래했다는 거야.
H가 수감된 이후 그의 안부를 빌미로 남편은 내게 자주 전화했다. 그러나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창 따위는 애초부터 그의 관심 밖이었다. 뻔한 그의 속셈을 알면서도 H와의 불확실한 관계에 지쳐있던 나는 그의 정성과 열정에 차츰 허물어졌다.
‘순수며 사랑이 다 뭐야, 이제는 쉬고싶다구.’ 이렇듯 자신에게 관대했던 나는 그러나 남편이 된 그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성공적인 사업가, 자상한 애처가임을 감사하기보다 그의 세속적 욕망과 지적 함량미달을 늘 부끄러워했다. 가령 김사장 손은 마이더스 손이야. 어떻게 하는 일마다 그렇게 재미를 봐. 누군가 자신의 사업수완을 추켜세우는 말에 제 손이 마도로스 손인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뭘 해도 손해는 안보니까요.라고 대답할 때라든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를 ‘모난 돌이 징 맞는다’고 표현할 때면 새삼 H와 그의 지성이 그리웠다.
아이의 방을 치우고 아침 설거지와 청소 그리고 빨래까지 한 통 돌렸지만 어제 밤부터 두근대던 가슴은 점심때가 다 되도록 내내 두방망이질 쳤다. 얘, 세상 참 좁더라. 글쎄 H선배의 와이프가 바로 우리 시누이 친구란다. 그전에도 애들 고모가 운동권 출신 남편 만나 고생하는 단짝친구 얘기를 가끔 했었는데 설마하니 그게 H의 와이프일 줄 어떻게 알았겠니?. 그러잖아도 며칠 전 그가 청와대 홍보수석실에 발탁됐다는 기사로 착잡하든 참인데 어젯밤 현경이의 전화에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애써 태연한 척 화분에 물도 주고 음악도 틀어보지만 얘, 그 사람도 너희 신도시 9단지에 산다더라. 현경의 마지막 말이 자꾸만 가슴을 파고들었다.
9단지는 내가 가끔 들르는 재래식 골목시장을 지나 아들의 학교 뒤쪽에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찾지 않으면 평소 그 쪽에는 특별한 볼일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그곳을 둘러본다 해도 이 시간에 그와 마주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 설사 마주친다 한들 이제 와 새삼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러나 한두 시간을 서성인 후 일찌감치 저녁 찬거리나 사 오자며 나선 발길은 어느덧 9단지를 향해 쭈뼛쭈뼛 옮겨가고 있었다. ‘뭘 그래, 그냥 그의 삶 언저리를 한 번 더듬어보는 것뿐인데...’ 오늘따라 손에 들린 고등어자반에서는 유난스레 비린내가 진하게 풍겨왔다.
엄마가 여기 웬 일이야? 아니, 이 시간에 너는 여기 웬 일이니? 아이가 내 팔을 잡아 흔들 때까지도 나는 녀석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 한 시간 일찍 끝나잖아. 미영이 집에 데려다 주려고 왔어. 얘가 9단지에 살거든. 놀란 가슴을 간신히 누르고 녀석을 자세히 보니 콧잔등에 송송 땀방울까지 맺힌 채 양어깨엔 무거운 책가방을 두 개나 매고 있었다. 게다가 양손엔 각각 도시락가방까지 들려있어 키가 작은 아이는 온통 가방에 파묻힌 형국이었다. 옆에 서있던 여자아이가 내게 고개만 한 번 까닥하고는 아들에게서 책가방과 도시락가방을 받아들고 재빨리 제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절망? 비애? 모멸감?... 아무튼지 내 속의 편치 않은 무언가가 냄비 속 고등어자반처럼 오후 내내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 아들 다 소용 없다더니 저 녀석 미영이 책가방까지 들어주더라고요, 속도 없이. 자신을 겨냥한 분노는 엉뚱하게도 이제 막 식탁에 앉으려는 남편과 아이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아들은 민망해하기는커녕 미영이의 시큰둥한 반응만 못내 아쉬워했다.
임마,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어디 있어. 끈기를 갖되 뭐니뭐니해도 사람은 찬스를 잘 이용할 줄 알아야 돼. 너 아빠가 네 엄마 꼬실 때 얘기 알고 있지? 처음엔 네 엄마가 이 아빠를 사람같이 여기지도 않더라 이거야. 그래도 내가 누구냐. 네 엄마 따라다니던 녀석이 잠시 사라진 틈, 다시 말해 그 철호의 찬스를 이용해 마침내 결혼까지 했다는 거 아니냐... 흥분한 그의 침방울이 연신 국그릇 속으로 낙하해 들어갔다.
식사를 마친 두 남자가 번들거리는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미영이 구애작전에 열중한 사이 긴 여름 해는 시나브로 기울었다. 그나저나 내겐 잠 못 이루는 밤이 앞으로도 며칠은 더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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