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임박한 어떤 시간이나 과제를 앞에 놓고 쫓길 때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그것이 얼마간 도피성을 띠고 있을지 모르지만, 초조와 긴장감이 커질 수록 여행에의 욕구도 그만큼 증폭되어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곤 한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데 눈앞에 떨어진 일은 촌각을 다투고 있고, ‘이제 그만! 여기서 곧바로 일어나 나가는 거야!’ 마음은 이미 출입구 손잡이를 잡고 서서 미친 듯이 맹렬하게 ‘떠나자!’를 외쳐댄다. 그런 갈등이 절정에 달할 때쯤 쫓기는 문제, 급한 일들은 대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대단원의 막을 내릴 준비를 한다.
신기한 것은, 막상 급한 일을 처리하고 나면 그렇게 맹목적으로 들끓던 여행에의 욕망은 어느덧 사그러들고 없다는 사실이다. 체력이나 정신력이 소진되어 떠날 힘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이미 여행 자체에 대한 매력을 상실한 것이다. 마치 영화 속 진진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배우들이 촬영 도중 실제로 사랑에 빠졌다가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사랑을 마감하는 경우와도 같다고 할까.
이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일 중 하나가 여행이라고 하니, 어쩌면 나는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 반대급부로서 여행을 떠올림으로 더 깊이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에너지를 뽑아내는 것인지 모른다. ‘이 일만 끝내면, 이 순간만 지나면 바다를 보러 가야지. 지금 이 모습 이 차림 그대로 산을 오르는 거야. 바람을 역으로 안으며 숨을 쉴 수 없을 때까지 달려야지...’ 그럴 때 바다나 산이나 바람은 찬란한 빛무리처럼 내 폐부를 찔러댄다. 사실 지금까지 어떤 여행에서도 그렇게 찬연한 바다와 산과 바람을 나는 만나지 못했다. 평생 그럴 것이란 걸 또한 나는 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한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이리라. W.해즐릿의 말처럼 ‘모든 장애와 불편에서 풀려나며, 자기 자신을 뒤에 남겨 두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일상을 떼어버릴 수 있는’ 여행길을 그 누군들 꿈꾸지 않으랴.
이따금 프란츠 카프카(’변신’ ‘심판’의 작가)를 생각한다. 그는 평생 프라하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겉으로 보기에 카프카는 평온한 삶을 누렸던 사람이다. 유복한 유태인으로 태어나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고 평생 근실하고 정직한 재해보험국의 일원으로 근무하다 생을 마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평생 프라하를 벗어나기를 꿈꾸었고 글 쓰기를 열망했던 고독한 인간으로서의 카프카가 있다. 조화될 수 없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그는 과연 어디로 가고 싶어했을지, 그가 갈망한 여행은 무엇이었는지 상상해 본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 하나의 여행을 끝냈다. 온 몸이 녹초가 되어 곤한 잠 속으로 걸어들어가지만 다시금 이 여행을 꿈꿀 것이다. 삶의 현재형, 살아 있음으로 회귀하는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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