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공직자가 관직을 버리고 나와 집권층의 잘못을 고발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과거 독재 정권 시절에는 본인의 생명이 위협받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문민정부 이후에도 그런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의를 지킨다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 때문에 밝혀져야 할 비리가 침묵 속에 사장되는 경우도 많다. 내부 밀고자를 백안시하는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소위 ‘휘파람 부는 사람’(whistleblower)에 대한 법적 보호 장치가 마련돼 있다.
미국도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전에는 정부 관리로 일하다 불만이 있으면 조용히 그만 두는 것이 관례였다. 이를 처음 깬 사람으로 레이먼드 몰리가 꼽힌다. 루즈벨트의 정책 보좌관이었던 그는 백악관을 나와 ‘7년 뒤’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는 그는 ‘온건한 보수주의자’를 자처하고 입후보 한 루즈벨트가 공약을 모두 어겼다고 맹 비난하고 다음에는 그에게 표를 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전례 없이 ‘무례한 행위’에 루즈벨트 진영은 펄펄 뛰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후에는 고위 공직자가 과거 자신의 상사를 공격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됐다.
닉슨이 탄핵 압력에 굴복해 사임하게 된 것도 전직 법률 고문이었던 존 딘이 사임한 후 닉슨의 죄상을 의회에 고발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부하의 충성심에 자신이 있던 닉슨으로서는 극복하기 힘든 충격이었을 것이다. 부하를 믿다 망신당한 것은 닉슨만은 아니다. 레이건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헤이그, 예산국장을 지낸 데이빗 스탁먼, 비서실장을 지낸 도널드 리건은 모두 옷을 벗은 후 신랄하게 전 상사를 비난하는 책을 썼다. 특히 리건은 낸시 여사가 점성술사와 국가 대사를 상의한다는 사실을 폭로해 망신을 줬다.
부하한테 당하는데는 민주 공화당이 따로 없다. 클린턴이 남북 전쟁 이후 처음 하원에서 탄핵 당하는 수모를 겪은 것도 국방부 직원이었던 린다 트립이 모니카 르윈스키한테 들은 이야기를 고발한 것이 발단이 됐다.
지금 워싱턴에서는 클린턴과 부시 행정부 하에서 테러 담당 보좌관을 역임하다 사임한 후 리처드 클라크가 펴낸 ‘모든 적들에 대항해서’라는 책이 화제다. 클라크는 연방 의회의 9·11 사태 진상 조사위원회에도 참석, 클린턴과 부시 모두 테러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으며 특히 부시는 처음부터 이라크에 온 신경이 집중돼 알 카에다의 위협을 등한시했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부시 진영에서는 클라크의 이중 인격을 문제삼으며 총반격에 나서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재선의 주제로 삼은 부시로서는 더군다나 공화당원인 클라크의 비판이 아플 수밖에 없다. 부하가 내부 실정을 폭로하는 것은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가슴 아프겠지만 잘못을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감추기 좋아하는 집권자의 견제 수단으로 필요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이제는 ‘휘파람 부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민경훈 미주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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