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경<국제회의 통역사>
911 사태 때도 그랬고, 미국-이라크 전쟁이 한창인 지금도 언론에서는 영웅들을 식상할 정도로 실컷 만들어내고 있다. 영웅(Hero)의 의미가 점차 퇴색되어가는 느낌이다.
911 사태 후에는 세계 무역 센터의 참사 피해자들의 목숨을 구하는 중에 사망한 뉴욕시의 소방수들과 경관들이 졸지에 영웅으로 부상했고 현 이라크 전시에는 당연히 위험한 전쟁터에서 전사한 군인들이 영웅이 되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어릴 때 숙제이기 때문에 재미가 없어도 어쩔 수 없이 읽고 독후감을 써야 했던 위인전에는, 태몽을 비롯하여 믿기 어려운 부분들이 제법 많았다. 그래도 당대의 업적을 놓고 객관적으로 볼 때 위인전의 인물들은 위인이 될 만했고 영웅이 될 만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누군가 존경하는 위인(영웅)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폭 넓은 지식과 교양을 소유하고 이상적으로 모든 학문과 예술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주위에 똑똑하고 현명한 신하들을 거느렸던 세종대왕 같은 분을 제외하고는 쉽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이유는 내게 영웅이란 나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더 훌륭한 인간이 되도록 영감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범적인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인격 향상을 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영웅이고 위인인 것이다. 예를 들어, 초대 받은 회의장이 백인석과 흑인석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백인석 앞에 놓여있던 자신의 의자를 끌어다 백인석과 흑인석의 한가운데 놓았던 엘리노어 루즈벨트 영부인은 나의 영웅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영웅은 언론이 만들어낸 유명인사인듯 싶다. 911 사태 때 사망한 소방수들과 경관들은 직무가 위험스럽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가운데 죽음을 만난 것이고 이라크에서 전사한 군인들도 대부분 미국의 소도시 출신으로 남들보다 대체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직업 군인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진정으로 투철한 애국심을 갖고 조국을 위해 언제라도 목숨 바칠 각오를 하고 군인이 된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군인의 임무도 소방수나 경관의 일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들의 죽음을 경시하거나 가족 친지들의 슬픔을 과소 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언론이 그렇게 부르듯이, 과연 영웅이라는 호칭이 이들에게 합당한지는 의문이 간다. 언론이 그렇게 부르기에 앞서, 우리로 하여금 더 훌륭한 인간이 되도록 우리의 내면에 깊은 감동을 주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렇게 부르고 싶은 진정한 영웅이 그리워지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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