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수<화가>
6.25동란으로 사람들이 부산으로 모여 들 때 나는 부산의 북쪽 끝머리에 있는 시골학교의 6학년생이었다. 우리 학교 건물이 ‘사관학교’가 된다고했다. 전교생이 학교앞에 있는 동산으로 옮겨갔다. 소나무가 아름답던 동산이 금새 시골아이 단발 머리 같이 변해갔다. 학급마다 자리를 잡으면서 선생님의 얼굴이 보이도록 소나무를 잘라냈기 때문이다. 1학년부터 밑에서 자리를 잡다보니 6학년은 동산의 꼭대기에 올라 앉았다. 넓은 하늘에 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푸른하늘의 구름무늬를 바라보면서 번개같이 날라가는 B-29의 긴 구름꼬리가 신기했다. 동산은 오물조물 계속해서 움직이는 아이들로 덮여지고 날마다 황폐해져갔다.
정상 수업은 없어지고 몇 달간은 오전 수업만 했다. 두 엄지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남은 네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고 입은 크게 벌리고 몸을 쪼그리고 엎어지는 연습을 날마다 했다. 적의 공습을 받을 때 그렇게 해야 된다고 했다. 우리 담임선생님도 자원해서 사관학교로 갔다. 젊은 선생님이 여럿 빠지고 아이들은 더 소란스러워졌다. 전쟁이 나니까 모든 것이 뒤죽박죽 난장판이 되었다. 시골의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오전의 부지런함도 오후의 한가함도 구별없이 모두들 바쁘기만했다. 하루 자고 나면 새 판자집이 생겨나고 또 생겨나고 해서 딱지딱지 판자촌이 이루어져 갔다.
날마다 피난온 학생이 편입해 왔다. 우리들은 기장이 길쭉잘똑하고 앞자락이 짧고 뒤가 축 쳐진 치마를 입었는데 그들은 무릎을 살작가린 반듯한 치마를 입었었다. 우리들은 사발을 엎어논 것 처럼 볼품없는 단발을 너풀거렸는데 피난온 애들은 머리를 땋기도하고 귀를 가린 단정한 머리였다. 우리들은 구리빛으로 피부가 두꺼워져 단단하고 광택나는 맨발에 검정 고무신을 신었는데 그들은 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예뻤다. 우리들은 생긴대로 어리쑥하고 촌스럽게 말하는데 그들의 목소리는 곱고 말씨는 귀여웠다. 선생님은 편입해온 아이들에게 잘해주고 똑 같은 친구가 되라고 늘 말씀하시면서도 예쁜 아이들에게 관심이 더 많았고 우리들은 뒤로 밀리면서 슬퍼했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하루면 갈 수 있던 서울이었는데 우리들의 외모에서도 문화는 이렇게 차가 났다.
휴전이 되면서 정부도 올라가고 피난온 사람들도 돌아갔다.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과 이북에서 피난온 사람들은 그대로 남게도 되고, 부산 사람들도 사업으로 직장으로 학교로 간다고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그래서 생활문화는 섞여지고 발전해갔다.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양새가 날이 다르게 서로 닮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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