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시공’
최정(산호세 >
어렸을 때 발레리나가 되는 상상을 한 적이 없는 여자아이가 있을까? 꽃잎처럼, 깃털처럼, 하르르 떨며 들어올리는 손, 고개를 높이 들고 발꿈치로 서서 팽그르르 도는 애잔한 모습...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의상이 작은 움직임에도 하늘거리는 섬세한 동작은 아름다운 것 이상의 어떤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참 오랜만이었다. 잊고 있던 작은 환상을 다시 느껴보는 것은.
발레 하면 나는 우선 “백조의 호수”가 떠오른다. 백조를 상징하는, 반짝 들리는 짧은 망사치마를 입고 군무를 추는 장면, 그 가운데 주인공 백조로 나오는 이가 조금 긴치마를 입고 우아하게 돌아가는 장면.. 스토리 자체가 현실적이 아니어서였을까, 발레는 늘 그렇게 환상적이면서도 한편으론 답답할 만치 천편일률적이었다. 발레가 예쁘게 느껴지면서도 별 흥미가 없었던 건 마치 꼭두각시의 움직임이 그렇듯이 가슴에 깊이 전해오는 진한 감정이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아니었다. 너무도 익히 아는 로미오와 줄리dpt의 스토리가 발레로 풀어지자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새삼스런 깨달음을 주었다. 카플렛과 몬테규라는 두 원수 집안의 젊은 남녀가 운명적 사랑에 빠지는 비극은 경쟁 상대인 두 가문의 화려한 군무로 시작된다.
젊은 남자들의 힘찬 군무는 그 화려한 의상과 신 오르는 춤사위로 무대가 터질 듯 가득 채우고 춤이 잦아들면서 전체를 훓던 초점이 두 사람의 만남으로 압축되며 환상적이며 낭만적인 그림을 그려낸다. 사랑에 빠진 두 젊은이들이 신비로운 달빛과 영롱한 별빛을 받으며 사랑의 춤을 추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오페라든 연극이든 발레이든, 무대 위의 실연은 늘 그 무대장치로 해서 더욱 빛이 난다. 이번 공연도 역시 시시 때때에 맞춘 무대장치가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어두움과 밝음으로 무대에 속도감을 주며 템포의 다양한 변화가 두 시간 남짓의 공연을 잠시로 느끼게 해주었다.
발레를 보면서 그 비극에 가슴이 뭉클하기는 처음인 듯 하다. 발레는 늘 그 비현실적으로 하늘하늘 한 몸매 때문에 현실감이 적었는데 이번, 줄리엣의 역을 맡은 황혜민은 그 애잔한 자태에도 불구하고 진한 슬픔을 전해준다.
아무튼 오랜만에 맘이 꽉 차오는 공연을 볼 수 있어 정말 좋았다. 한국일보는 예전,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늘 문화에 깊은 관심을 주고 많은 문화적 이벤트를 마련해 각박한 현실에 윤기를 주는 일을 맡아 항상 고맙다. 앞으로도 이 같은 수준 높은 공연을 많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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