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옥<자원 봉사자>
올해는 집 앞 화분에 가꾸는 토마토가 짙푸른 잎들을 펼치며 작은아이 키만큼이나 불쑥 올라오는 것이 제법 대견했는데 어느 날 아침에 나가보니 푸른 열매며 새순이 누가 황급히 손으로 훑어 내린 것처럼 쑥대밭이 돼있었다. 애지중지 꽃망울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던 목부용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기 손처럼 살그머니 펴지던 연두색 새순들이 가차없이 잘려져 나갔다. 너무 속이 상해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스팔트로 포장된 차도에 흔적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였다.
뜰이 없는 집으로 새로 이사온 후 흙이 그리워서 하나씩 둘씩 심어 돌보는 화분들이, 가끔 숨막히게 가슴이 답답하거나 너무 피곤해 머리가 멍해질 때 오아시스처럼 안식처를 내주곤 한다. 저녁나절 단풍나무 뒤에 내다 놓은 의자에 앉아 거뭇거뭇 다가오는 휴식의 그림자에 지친 영혼을 적시며 자칫 메마르기 쉬운 삶의 달림 길에서 잠시 멈춰 선다. 레이스처럼 잔잔한 꽃묶음이 수줍은 듯 수수하고 넓적한 잎 사이로 살며시 얼굴을 가리는 수국을 보고 같이 조용히 고개 숙이고, 연등처럼 화려한 핑크빛 초롱을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고 쓰레기통 옆 모퉁이를 마다 않으며 신전처럼 밝히는 초롱꽃의 경건함을 함께 나눈다. 아무 말 건네지 않아도, 그냥 쳐다만 보고 있어도 편안한 존재가 세상에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일까. 조용히 자신의 있는 모습을 침묵으로 나누는 꽃들 앞에서 신선한 수액이 발끝을 통해 마른 영혼을 적셔 오는 것 같은 느낌에 깊은 잠을 자고 난 사람처럼 차분한 얼굴로 다시 복잡한 일상의 문을 열고 돌아간다.
보리야, 사슴이 왔다 갔나보다. 토마토를 제법 먹었더라.
불이 나게 밖으로 뛰어 나갔다 온 딸애는 점찍어 두었던 빨간 토마토가 없어졌다며 애재라 한다. 한창 메마른 건기에 사슴들도 싱싱한 푸른 야채가 별미였겠지. 딸에게는 서로 나눠 먹으며 사는 거라고 태연하게 이야기했는데 그나저나 맛 들려서 매일 찾아오면 어쩔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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