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을 과일 노점상으로 살았지만 ‘내 인생은 성공이었다’는 정애자(오른쪽)씨가 손님에게 대추를 담아주며 활짝 웃고 있다. <서준영 기자>
올림픽가 청과 좌판
‘당당한’정애자씨
반듯하게 키운 남매
약초농장까지 일궈
LA한인타운 올림픽 블러버드와 노턴 애비뉴 인근의 한 사우나 앞 길거리에는 시골 장터에서나 볼 것 같은 청과노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번듯한 간판도 진열대도 없지만 노점 경력 25년의 정애자(63)씨가 지키는 좌판 청과상이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 본격적으로 좌판을 벌이는 정씨의 업소(?)로 고객들이 찾아들면 절반은 ‘반말지거리’같은 흥정이 시작된다. 수만명의 손님들을 맞아 본 탓인지 어설프게 ‘깎고보자’는 고객에겐 “살려면 사시고 말려면 마십쇼”라는 ‘솔직 간단’ 전략으로 맞선다. 어찌보면 “노점상 아줌마가 너무 당당하다”는 인상을 주겠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십수년간의 노하우서 오는 ‘품질에 대한 자신감’이고 아이들을 들쳐업고 단신으로 태평양을 건너와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여자 혼자 좌판 장사한다고 무시도 당하고 힘도 들었지만, 거짓말 한번 안했고 자식들 다 잘 커줘서 이젠 내 한몸 추스릴 수 있으면 된 것 아닙니까.”
정씨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 “과부중에 나보다 나은 사람 별로 없을 걸요”라고 당당히 말하기 까지 통과해온 삶의 터널은 길고 어두웠다.
동대문에서 옷장사를 하던 정씨는 사업이 망하면서 남편과 헤어지자 1969년 두 자녀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넜다. 사우스 다코다와 디트로이트를 거쳐 LA 동남쪽 벨플라워에 자리를 잡아 외상으로 마련한 재봉틀로 재봉일을 시작해봤다. 6~7년을 했을까. 발전이 없겠다는 생각에 밴을 한 대 구입해 라면, 참깨, 참기름, 멸치 등을 싣고 세리토스, LA다운타운, 가디나, 토랜스, 가든그로브 등 봉제 공장을 돌기 시작한 것이 노점상의시초다.
“싸고 맛있다”는 입소문이 퍼질 즈음 한인 대형 마켓이 늘어나면서 이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한인타운에 좌판으로 정착한 것은 10년쯤 전부터다. 50을 넘으면서 자식들도 잘 자라줬고 힘도 들어 ‘장돌뱅이’ 행상은 그만두기로 했다.
정씨는 “돈 욕심을 냈으면 부자가 됐을 것”이라면서도 “큰 돈은 못 벌었지만 집 한 칸은 장만했고 정부 도움 안받고 살아가고 있다”며 스스로의 삶을 ‘성공’으로 평가한다.
최근엔 1985년 투기 바람이 불 때 사놨던 땅 2에이커에서 신선초, 유모초, 알로에 등의 약초재배로 명함도 가진 어였한 사장님이다. 물론 좌판 비즈니스 라이선스도 받아 두려울게 없다는 것.
가끔 ‘여자’라는 이유로 괄시도 많이 받았지만 오랫동안 맺어온 손님들과의 인연으로 남가주 곳곳으로 배달까지 다니며 이젠 지나온 시간을 관조하며 느긋하게 세상을 대하게 됐다.
14년 몰았던 밴 승용차 ‘다지 램’이 슬슬 말썽을 피워 어쩔 수 없이 지난 5월 신형 밴을 장만했기 때문에 5~6년은 너끈히 더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정씨의 생각이다.
정씨는 “살아있는 한 큰일은 못해도 내 사는 모습 자체가 후손들에게 모범이 됐으면 한다”며 단물이 듬뿍 든 큼직한 자두를 기자에게 건넸다.
<배형직 기자>
hjba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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