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낭만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던 독일, 그 독일에서도 낭만주의 문학의 선두중심이자 가장 보기 좋고 건강한 거목이었던 노발리스와 그 낭만주의 세력과 끊임없이 반목한 공산주의의 비조 칼 마르크스가 종교를 두고는 동일한 말을 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무신론자 마르크스야 당연히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말을 내 뱉었겠지만 독실한 루터교도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가톨릭 하에서 통일과 조화로움을 구현한 중세시대를 동경했던 낭만주의자 노발리스가 종교를 왜 이렇게 표현했나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그가 쓴 글의 본문을 살펴보자. “당신들이 말하는 종교는 아편으로 만든 마취약 같은 작용을 한다. 그것은 매혹시키고 달래주고 나약함에서 오는 고통을 잠재우는 것이다.”
이 글을 분석 해체해 보면 종교에 대해서도 아편에 대해서도 그것이 나쁘다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지 않은 가치 중립적인 문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편을 마약이 아니라 아주 잘 듣는 통증치료제로 대입시키면 적절한 비유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노발리스는 18세기말 사람, 그때 아편의 존재는 그리 위험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냐하면 여러 문헌에서 사람들이 아편을 섭취한 경우는 보여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취급한 기록은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러 19세기 사람 마르크스는 낭만주의자들과 맹렬한 사상투쟁을 하고 승리한 관념론의 태두 헤겔의 철학 에센스를 그대로 다 받았다. 산업화가 시작된 유럽은 계급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현실의 비참함을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프롤레타리아를 다시 잠재우는 역할은 보수적인 종교집단의 몫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게 그 당시 교회의 역할이었다. 지금도 역시 그러하지만 그때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 보다 그 자체를 즐길 줄(?) 알아라 하는 게 교회의 태도였을 것이다.
다독가 마르크스는 낭만주의자 노발리스의 글을 인용해 그것을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마르크스 시대의 아편은 그 전 세기보다 나쁜 작용을 했고 이미지 역시 더 안 좋았다.
20세기 대한민국 어느 교실에서 반공교육을 받던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책을 보면 범죄자가 되는 현실이었는데도 그의 종교관을 담은 구절은 교과서에서 보았다.
당시 우리에게 아편의 이미지는 19세기 유럽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더 안 좋았고 종교는 숭고한 것이었다. 이런 말을 함부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방약 무도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신의 존재유무를 떠나 종교는 우리에게 좋은 역할을 많이 한다. 사실 종교가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적으로 건강하고 건전하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상처가 있을 터인데 종교는 그 아픔을 많이 완화시킨다.
그러나 어떤 진통제라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심각한 부작용이 오듯 지나친 근본주의적 믿음은 약먹은 사람처럼 헛소리를 하다가 남에게 피해를 주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도 망가뜨린다.
김경묵/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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