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원<아름다운 재단 간사>
드디어 우기가 시작되었다. 목말라 있던 대지와 초목이 기뻐서 탄성을 지르는 듯, 늦가을 단풍과 하늘빛은 더욱 선명하고 윤기가 흐른다. 비 오는 날씨 자체에 대한 기호는 사람마다 엇갈림이 있지만, 비 오고 난 뒤의 청명함과 무지개를 마다할 자 있을까.
비가 오면 황순원의 ‘소나기’와 같은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비는 운명적인 만남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소재로 문학과 영상에 종종 등장해 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산을 받쳐 주며 설레는 만남의 시작이 이루어 진다던가, 폭우로 인해 돌아가는 길이 끊겨서 주인공들이 본격적으로 엮어지게 하는 등의.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법한 그런 애틋하고 낭만적인 사연 대신, 내게는 대자연의 위력을 깨닫게 해준 경험이 언뜻 떠오른다.
지지난해 이맘때쯤 하와이에서는, 그다지 우기가 길지도 강우량이 많지도 않은 예년의 기록을 깨고, 급작스레 내린 집중호우로 냇물이 범람하고 학교 도서관 및 몇몇 건물들이 침수되었다. 큰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지하 교실에서 수업 중이던 학생들과 교수는 창문을 깨고 탈출해야 하는, 당시로서는 보도되지 않은 사건이 있기도 했다. 기숙사에서는 전기가 끊긴 3일 동안 저녁마다 ‘냉장고에서 음식이 썩기 전에 나눠 먹자’는 궁여지책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도서관은 6개월 동안 문을 닫았고, 완전히 물에 잠겨 초토화된 정부간행물실 등은 아직도 복구가 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이 홍수의 원인을 규명한다며 이런저런 가설들을 내어 놓았는데, 인위적으로 물의 길을 막아 돌려놓고 학교를 지은 것이 화근이었다는 주장이 이목을 끌었다. 홍수가 도심위로 휩쓸고 간 물길이 공사 전 자연스레 냇물이 흐르던 길과 놀랍게도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 듣는 사람마다 자연의 기억력과 인간의 한계에 일순 숙연해졌다.
이곳에선 온종일 주룩주룩 비가 오기 보다는 비는 주로 밤에 내리고 낮에는 맑다고 한다. 그렇다면 참으로 친절한 날씨다. 사람의 눈이 빛이기에 빛은 빛끼리 통한다고, 눈으로 햇빛이 들어와야 세포가 기뻐진다 하니까. 날씨가 우중충한 곳에서 사색가가 나올진 몰라도 우울증도 빈번하고 스트레스 지수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비더러 내려라 하면 내리고 그쳐라 하면 그치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비에 마음이 우왕좌왕 하진 말자고 다짐해 본다. 그것도 날씨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빗길에 운전조심, 그리고 마음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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