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박사가 설립한 한인기독학원’(13)
▶ 민찬호 교장 부임
1919년 6월 6일에 졸업식을 가졌는데, Shim [Kim] Shin Sil, Park Sung Cho, Kim Bo Pai, Choo Young Soon, Lee (Maggie) Bu Chun, Park Sung Gum, Choi Yil Bok, Hong Woo Won, Kim Choong Sung 등 9명이 졸업하였다.
하와이왕립악단의 버거 단장이 지도하는 오케스트라가 졸업식에서 연주를 하였다.
또 여선생 힐스 (Mrs. C. A. Hills)에게서 지도 받은 학교 합창단이 영어노래와 한어 노래를 불렀다.
카와이아하오교회 (Kawaiahao Church)의 담임목사 Akaiko Akana의 축사와 미국인 제일감리교회 목사 Leon L. Loofbourow의 축도가 있었다.
이승만은 1919년 1월 6일에 미주 본토로 떠나 여러 곳을 들러 와싱톤에 있었기 때문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Hartson 교장이 이들 외부 인사들을 졸업식에 참석토록 한 것으로 한인기독학원이 하와이 사회에서 고립된 한인들만의 조직체가 아니었음을 일러준다.
이승만이 1919년 1월 21일에 로스앤젤스의 민찬호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민찬호는 1913년에 Mollie Hong과 결혼한 후 1917년에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로스앤젤스 한인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이때 이승만이 민찬호에게 호놀룰루로 돌아와 한인기독교회와 한인기독학원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한 것 같다.
이승만은 민찬호를 만난 후에도 계속 미주 본토를 여행하고 1920년 6월 29일에 호놀룰루에 돌아 왔다.
그리고 이승만은 7월에 하와이 감리교선교부에 한인기독학원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왜 이러한 요청을 하였는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다. 학교운영상의 재정적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1919년 9월) 바빠졌기 때문인지, 혹은 여러 복합적인 이유 때문인지, 이승만이 학교운영을 포기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와이 감리교선교부는 이 요청을 받고 문을 닫았던 한인중앙학교를 다시 운영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곧 9 명의 이사로 인수위원회를 조직하고 한인기독학원 인수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동조자들이 반대하였기 때문에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민찬호는 1919년 10월 10일에 도착하여 한인기독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동시에 Hartson 교장 후임으로 한인기독학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가을 학기에 학생수가 144명 (남학생 77명과 여학생 67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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