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박사가 설립한 한인기독학원’(15)
▶ 학생들의 고국 방문 계획
1921년 8월 10일에 본토로 갔던 이승만이 1922년 9월 7일에 호놀룰루로 돌아와서 한인기독학원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곧 Ocean View 대지를 1만 1천 600 달러에 팔고, 칼리히(Kalihi) 지역에 35 에이커의 땅 (현 Kalihi 초등학교 자리)을 1만 5천 달러에 구입하였다.
그리고 미국인 친지들에게 학교 건축후원금 헌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1923년 6월 9일자로 되어있는 이 편지에 학교 건축계획과 건축비용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는데, 예배실을 포함한 교사와 남녀 학생 각각 60명을 수용할 기숙사 2동, 도로공사, 건축설계사비 등등을 포함하여 4만 5천 883 달러의 경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각 기숙사에는 식당, 독서실, 학생 침실과 교사들의 생활공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건축을 위해 한인동포들에게서 1만 달러 정도 걷고, 1920년에 팔려고 계획했던 한인여학원 Puunui 부지를 1만 2천 달러에 팔아 빚을 청산하면 현금 6천 5백 달러를 쓸 수 있으며, Westervelt 목사가 약정한 1천 달러와 미국인 친지들이 2만 8천 683 [383] 달러를 기부한다면, 모든 계획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 후 시공자 Augusturs S. Cantin이 지하실과 돌기둥을 없애는 등 설계를 좀 변경하여 다른 회사들 보다 1만 1천 311 달러 싼 2만 8천 달러에 지어주기로 하였기 때문에 1만 5천 달러만 더 모금을 하면 되었다.
한편, 이승만과 민찬호는 1922년 10월 26일부터 11월 6일까지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차 범태평양 통상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서울의 동양물산주식회사 전무취체역 김윤수를 만나 기독학원학생들의 학교건립기금 모금을 위한 고국 방문 가능성을 의논하였다.
해외동포 학생들이 학교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국을 방문하는 것은 선례가 있었다. 1921년 4월 25일부터 6월 4일까지 이강(李剛)이 블라디보스톡 중학교 설립을 위하여 학생음악단을 인솔하여 고국을 방문했고, 같은 해 8월에는 간도(間島) 동포들이 고국에 가서 간도의 유일한 동포 중학교인 영신학교 확장을 위해 국내 동포들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1922년에도 블라디보스톡 학생연예단, 기독청년회 음악단, 천도교청년회 연예단 등이 잇달아 고국을 방문했고, 서간도의 동포모국방문단이 다녀가기도 하였다. 하와이 한인들의 경우 모국방문은 이미 1912년부터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호놀룰루의 일본영사관에 여권을 신청하여 여권을 발급받고 다녀올 수 있었다. 따라서 기독학원 학생들도 모국방문을 위하여 일본여권을 신청하여야 했다. 그러나 하와이를 포함한 미주 한인사회에서 학생들이 일본여권을 신청하여 고국을 방문한다는 계획에 대해 친일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923년 3월호의『태평양잡지』는 「호항학생의 내지 유람설」이라는 제목아래 (p. 29) 학생들의 모국방문은 “본래 러시아령과 중국 령의 우리 학생들이 음악대와 야구단을 조직하여 내지에 유람하고 온 상황을 듣고 우리도 그와 같이 하여보자는 주의로 시작한 것이라“ 고 설명하였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