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 이승만은 1923년 7월 15일에 학교 건축을 시작하여 두 달 후 학생들이 돌아 온 바로 다음 날인 9월 19일에 한인기독학원 교사와 남녀기숙사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낙성식에는 700여명의 한인들이 참석하여, 한인기독학원이 독자적 교사를 갖게 된 것을 축하하였다. 이 낙성식에서 민찬호와 김영우는 고국방문 보고를 하였다.
1925년 7월에 서울의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Mary Moon (한국 이름은 알려지지 않음)이 도착하여 한인기독학원에서 한글을 가르치기로 되었다고 Honolulu Star Bulletin이 보도하였다. Moon은 Oberlin College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떠난 Bessie Lim 교사의 후임으로 왔다.
신문 기사는 Moon이 일본어, 중국어 영어와 한국어에 농통하기 때문에 한인기독학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교장 노듸 김해김의 말도 인용하였다. 아마도 Moon이 1923년 한인기독학원 학생들의 고국방문에 관한 기사를 통하여, 한인기독학원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Moon은 한국에서 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와서 가르친 첫 교사일 것이다. 그가 얼마동안 한인기독학원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학생 수는 1928년에 54명이었고, 1929년에는 74명, 30년에는 75명으로 5살부터 16 살까지(9학년)의 학생들이었으며 5명의 교사가 가르쳤다. 1930년 8월 16일자 Honolulu Star Bulletin의 Fund Started for Benefit of Korean Home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의하면, 기독학원은 1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을 따로 짓기 위하여 5천 달러 기금모집을 하였는데, Mrs. Maude B. Cooke이 1천 달러를 기부하였으며 다른 서양친지들의 기부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Cooke 부인은 하와이에서 알려진 사업가의 부인으로, 학교, YWCA 등 많은 기관에 기부를 하였다. Cooke 부인이 한인기독학원에도 기부를 하였다는 신문 기사는 다른 백인들의 후원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 기사는 또한 기독학원 설립 경위와 칼리히 캠퍼스의 정황 등을 자세히 보도하였다. 기숙하고 있는 학생들의 대부분이 고아이며, 학비는 무료이지만, 기숙비로 한달에 10 달러씩을 내며, 또 학생들이 기숙사 일이나 부엌일을 한다고 하였다. 식당 건축비 이외에 1923년에 지어진 건물들을 보수하기 위해서 또 5천 달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당시의 학원 이사장은 이승만, 부이사장은 강영복 (의사), 서기는 이용직 (한인기독교회 목사), 회계 Chester Livingston 그리고 이사 Dr. Y. Park, D. J. Day, C. J. Pietsch, 교장대리 (acting principal) 양유찬 과 기숙사 사감(superintendent)은 노듸 김이었다. 그 후에 학생수는 계속 감소되었고, 김노듸의 월급도 지급할 수 없을 정도로 재정 형편도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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