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박사가 설립한 한인기독학원’(19)
▶ 기숙사로만 운영
기숙사에 전기가 없어 촛불을 켰으며, 어두워지면 잤다. 세면대는 기숙사 안에 있었으나, 화장실은 실외에 있었다. 특별히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기억은 못하지만, 배가 고팠다는 기억은 없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는 친구들과 함께 인근 산에 올라가 과일을 따먹거나 개천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 등 돌아 다니면서 놀았다.
가끔 나이 든 학생들이 꿩을 잡아 학교 마당에서 구어 먹은 기억이 난다.
교실은 남자 기숙사에서 언덕으로 더 올라간 곳에 있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여학생 기숙사가 있었다.
그 옆에 조그마한 집이 있었는데, 그 곳에 이승만 박사 내외분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
학교에서는 한번도 이 박사를 본 적이 없고, 교회에서만 보았다. ‘영어학교’ (Likelike School, 한인들은 공립학교를 영어학교라 불렀다.)에 다니기 시작한 후에는 학교가 끝나면 국어학교에 갔다.
한인기독학원 교실에는 각자의 책상이 없었는데, 팔라마 (Palama) 지역에 있는 국어학교 (한인기독교회 부속 신흥국어학교) 교실에는 각자의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위의 Honolulu Star Bulletin의 기사와 Richard Hong의 회고로 미루어 한인기독학원이 1930년 8월에 시도했던 기금모집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더구나 동지식산회사의 동지촌의 파산과 함께 1931년 11월부터 1935년 1월까지 이승만이 미주 본토와 유럽으로 다니는 동안 한인기독학원은 최저의 수준만 유지하면서 기숙사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돌아온 후에 학교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1936년 재정보고서에 의하면, 1935년 7월과 8월 방학기간에 이승만의 월급조로 10 달러씩과, 기숙사 곡상(주방장)의 월급 12 달러의 반인 6 달러씩을 지급하였다.
9월에는 국어교사 월급이 39 달러, 이승만 월급 9 달러, 주방장 월급 12 달러가 지급되었고, 10월에는 백인 교사 2명의 월급 100 달러, 국어 교사와 주방장의 월급 39달러, 이승만의 월급 15 달러가 지급되었다. 그 후 1936년 6월까지 교장 이승만, 백인교사 2명, 국어교사, 주방장의 월급 등이 계속 지급되었다.
1936년 가을 학기에는 교사 Stevenson 내외가 9학년 (중학과정) 까지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생 수는 40명 정도인 것으로 추측된다.
1938년 5월 29일에 한인기독교회에서 전기숙, 정수옥, 리 예나벨, 조 리차드, 김 프란씨스의 졸업예배와 졸업식이 있었다.
오전 졸업예배에 진주만해군부의 군목 E. L. Ackiss의 설교가 있었고 한인기독교 찬양대의 찬송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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