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박사가 설립한 한인기독학원’(21)
▶ 한인기독학원 폐교
어느 정도의 기금이 모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1939년 3월 30일에 이승만은 미주 본토로 갔다가 8월 10일에 하와이로 돌아와서, 양유찬을 이사장으로 임명한 후 11월 17일에는 부부가 다시 미주 본토로 갔다.
이 때부터 이원순이 학원 교무를 맡아 보았고, 그의 부인 이매리가 홈장(기숙사 사감) 직을 맡았다. 이 후 학교는 다시 기숙사로만 운영된 것 같으며,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이 기숙사에는 41명의 학생이 살고 있었다. 이 학생들은 매일 오전에 45분 동안 이매리 사감, 한인기독교회 부목사로 시무한 Dr. Luther O. McCutchen 목사와 그의 부인의 지도아래 영어와 성경공부를 하였다. 또한 학교내에 0.75 에이커의 밭을 일구어 여러가지 채소와 고구마를 재배하였다. 당시 하와이의 모든 학교는 전쟁에 대비하여 이러한 활동을 하였는데, 한인기독학원 기숙사에 기거하는 학생들도 이런 활동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였다. 이매리가 1946년까지 기숙사 사감으로 있었다.
이승만이 학교를 재활·운영하려고 하였으나, 한인기독학원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지났다. 한인 인구가 1910년부터 서서히 증가하지만,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의 수는 1920년대를 정점으로 그 후 급격히 감소하여 1930년대에는 500명 미만이었다.
그리고 1940년대에 이르러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은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1940년대에는 한인들이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었으며, 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학생들은 집 근처 공립학교에 다녔다.
이런 상황에서 호놀룰루 칼리히 계곡에 위치한 한인기독학원의 기숙사에 살면서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 수가 감소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부모가 없거나, 혹은 집에서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경우에나 기숙사에 기거하였고, 한글과 한국역사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 기독학원을 고집한 몇몇 부모의 자녀 이외에는 한인기독학원이 필요 없게 되었다.
결국, 한인기독학원은 1947년에 폐교되었다. 한인기독학원은 이승만이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기독교 교육에 충실하면서 지도력을 겸비한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남녀공학제 학교였다. 약 30년 동안 학비는 받지 않고 기숙사비만 실비로 받아가며 200-3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한인기독학원 졸업생 가운데 한국으로 돌아가 활약한 사람은 월터 정 (국무총리 특별보좌관), 박만서 (한국전기회사 사장), 이영구 (부산중학교 교장)이다. 하와이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진 졸업생은 홍우원 (첫 졸업생: 카파훌루의 백화점 사장), 최성대 (하와이 베이커리 산문 용달회사 사장), 박맹조 (앨리스 김: 한인양로원 원장), 최백렬 (Fort Shafter 육군본부 군복 재봉소 주무원), 박진한 (동지회 중앙부장겸『태평양주보』주필), 최을복 (마우이 농림국 위원), 이갑성 (미육군으로 한국 주재 미군사령부에 근무), 이학신 (이치기 Gertrude Lee, 실업가로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 재무), 살로메 한 (후에 한인양로원 원장)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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