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전쟁은 끝나고
■ 통한의 휴전
드디어 1953년 7월27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내가 군단장으로부터 받은 휴전 지시는 7월 27일 정오 12시를 기해 사격을 포함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휴전 조약에는 한국정부의 반대가 있었으며 당시의 한국 정부의 휴전반대 정책도 미 군단에 소속된 한국 사단장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통일 되지 못하며 남침과 막대한 군과 민의 인명과 재산 피해를 초래케 한 북의 남침을 응징 못하였으나 부하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 착잡한 심경을 표현키 어려웠다. 나는 군단 명령 중 사격중지 명령을 오전 11시로 당겨 수정해 내렸다. 이제는 유사시를 위해 비축할 필요가 없는 탄약이니 전부 사용해 적을 응징하는 포격을 가하도록 하였다. 적으로부터의 반응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해서 휴전날은 지나갔으며 휴전 수일 후 방탄조끼를 입고 맥마산정에 올라가 보았다. 아군 진지 전방에서 내려다보이는 골짜기를 관측해 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휴전 후의 사단은 관급되는 시멘트과 목재를 이용해 휴전선 2km 남방 비무장지대 후방 능선을 따라 3선의 진지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한 진지 시찰이 따랐다.
■ 인원 장비의 전후 점검과 사단의 이동
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내가 신경을 쓴 일은 사단의 인원과 장비를 점검 하는 일이었다. 전쟁 중에는 정확한 인원과 장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차량 장비 및 보급품들이 암시장에 나돈다는 말도 있었다. 휴전과 더불어 인원 장비와 보급품의 손실을 위장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모처럼 정직한 사단으로 출발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손실의 정직한 보고를 위해서는 손실의 원인이 추궁되거나 처벌이 가해지지 아니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육군 본부에 가서 군수 관계자들과 상의를 해보았다. 당시의 군수국장은 백선진 준장으로 숙의한 끝에 오히려 격려를 받게 되었다. 군사 고문단과 의논을 해보았다. 그들은 무조건적 인정은 어렵다는 태도였다. 나는 모처럼의 한국군의 정직을 위한 시도를 군사 고문단이 반대한다는 보고를 상부에 제출하겠다 협박을 했다. 2주간의 시간 여유를 요구하였다. 2주 후 고문단은 동의를 해주었다. 고문 단장과 상의를 해본 모양이었다.
중대장 이상을 모아놓고 그 뜻을 전하며 분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단장이 책임질 터이니 모처럼의 보고를 정직히 실행해 후환이 없도록 요청을 하였다. 분실은 놀랍게도 인원을 위시해 차량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책으로 수권이 되었다. 육군에서 처음 있었던 정직을 위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후일 들은 이야기다. 사단장이 무슨 권한으로 그런 분실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고 일부 중대에서는 나의 약속을 믿지 못해 정직한 보고가 되지 못했다 한다. 이 사건은 나에게는 혁명적 사건이었으나 내가 사단에 오래 머물지 못해 그 효과는 모르게 되었다. 사단은 휴전 후 곳 미 24사단과 교체되어 경기도 일동으로 이동해 돌로 막사를 지은 후 사단 창설일 행사를 마무리하고 새로 창설되는 제1 야전군의 사령관 대리 겸 참모장 임무를 띠고 관대리로 향한 것이 1953년 해가 저무는 12월 15일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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