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베이징에 입국하다.
1. 두 개의 베이징
12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베이징 공항. 미국 항공사의 비행기는 눈물이 나도록 낙후했고, 한국에서는 미스코리아들의 전직으로 유명하다던 여승무원들은 그들이 일하는 비행기만큼이나 늙고, 곧 쓰러질 듯 지쳐보였으며, 따라서 서비스는 ‘아 좀 막가는군’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12시간 동안 좌골신경통으로 저려오는 오른쪽 다리를 어쩔 줄 몰라하며, 먹으면 뱃 속 가득 가스만 차오르는 기내식이나마 제 시간에 얻어 먹게 되기만을 소망했다, 12시간 동안.
내겐 두 개의 중국, 아니 베이징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손가락으로 헤아리기도 벅찬 수많은 왕조들의 흥망성쇠와, 공산주의와 문화 혁명, 그리고13억 인구가 발산해 내는 빈곤의 아우라 속에 황량하게 선 차이나. 당연히 그 나라는 오랜 빈곤이 만들어낸 낙후한 풍경들로 다가오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루신과 마오 쩌둥의 카리스마처럼 정신적인 아우라가 풍요롭다.
또 다른 하나는 올림픽을 앞두고 하루가 멀다하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오르는 마천루와 잔치 치르기 전날의 이상한 분주함이 가득한 경제특구로서의 이미지. 베이징 땅에 발을 디디기 전에는 그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기에, 이 두 개의 상이한 풍경은 이제껏 내 상상 속에서 좀처럼 뒤섞이지 않은 채, 5일장의 따로 국밥처럼 각기 다른 두 개의 이미지로 존재하고 있었다.
과연, 중국, 아니 베이징은 석양 속에 서 있는 오천년 옛도읍지 같은 느낌일까, 아니면 21세기 세계 경제를 한 손에 쥐락펴락할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느라 주리장창 힘이 뻗치는 개발도상국의 느낌일까. 전자라면, 사람들은 그 성대했던 추억에 잠겨서 비애를 느끼겠지만, 오히려 곤궁한 삶 속에서 피어오르는 정신의 아우라가 아직도 이 세상 그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약간의 향수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역사의 죽음과 맞바꾼 근대화나 대륙의 자존심과 맞바꾼 개방의 물결을 우리는 섬세하게 뜯어 보아야 하리.
2. 옛날 옛적에 베이징에는
역사란 단지 부나비의 꽁지에서 빛나는 불빛 정도의 후광일 뿐인 것일까. 역사의 종언 이후, 더우기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베이징이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거의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김포 공항보다 딱 세 배 정도 덜 촌스러운 베이징 공항을 나와 잡아 탄 택시는 무지무지한 속도감으로 질주한다. 도시 외곽의 수많은 링들(베이징의 교통 시스템은 외곽으로부터 5번 링, 4번 링, 3번 링, 2번 링, 1번 링과 같은 번호로 불리운다. 숫자가 높을수록 외곽이며, 중심지는 세컨링부터 시작된다) 을 지나 세컨 링에 들어서자, 시골 새색시처럼 약간 촌스럽지만 수더분한 느낌이라든지 지방 소도시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조용함이나 느긋함은 사라지고, 도시는 완연히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색칠만 새로 했지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남루함이 눈에 사무치는 그 허름한 아파트 지대를 지나고 공사 중인 마천루 숲을 넘어서자 시원하게 뻗은 장안대로 변으로 납작하게 드러누운 자금성이 눈 앞에 다가오고, 맞은 편으로 천안문 광장이 펼쳐졌다.
아, 베이징이구나. 나는 그제서야 내가 베이징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장안대로는 자전거와 인파와 자동차들이 섞여 하나의 이해하기 힘든 그림으로 둥실 떠올랐다. 길을 건너는 사람들은 차를 의식하지 않았고, 차또한 보행자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으며, 그 북새통에 자전거와 락사, 그리고 리어카들이 떼를 지어 꿈틀꿈틀 뒤섞여 들었다. 참 이상도 하지, 그래도 그곳엔 접촉사고 한 건 나는 걸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어쨋든 이밥에 요리조리 좁쌀 섞이듯 제멋대로 뒤섞여 돌아가는 아수라장 같은 이 교통체계에 적응한다는 사실은 요원할 것같다는 좌절감 비슷한 걸 느꼈음을 고백해야 하리.
3. 아주 오랜 현재, 그리고 베이징
택시는 왕푸징(서울로 치자면 명동 쯤 될법한 곳)의 오리엔탈 플라자 내 호텔 정문에 닿았다. 살았구나,(베이징 택시운전기사의 묘기 운전술은 성남의 총알 택시를 방불케 함이니 임산부나 노약자는 탑승 시 꼭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을 권한다)하는 긴 한숨을 쉬면서 호텔 입실 수속을 밟은 후, 천근만근인듯 짐가방을 질질 끌고 방으로 올랐다.
쿵쾅 쿵쾅, 우당탕, 부우우웅, 지이이잉.
앗 이게 무슨 소리인가, 베이징 한복판이 지진대에 속했던가. 묵기로 했던 방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신경 거슬리는 소음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랬다. 베이징은 바야흐로 ‘메이크 오버’ 중이었던 것. 올림픽을 앞두고, 베이징은, 거짓말 약간 보태 ‘도시 전체’를 허물고 새로 짓거나 내부 수리 중에 들어갔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 그러니까 비수기가 아닌가.
좀 오래되거나 남루한 과거를 상징하는 구조물들은 부수고 새로 짓거나, 그도 아니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했고, 오래된 아파트들은 알록달록한 색칠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기법을 선보이고 있는 베이징은, 여차하면 때려부수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은 빌딩만을 끝도 없이 지어 올리는데 갖은 현대 수학과 물리학과 공학이 동원하고 있었다.
그랬다. 천안문 광장과 하이얏 호텔과 오리엔탈 플라자의 왕푸징이 베이징의 ‘오래된 현재’를 그리고 있다면, 자금성과 천단과 후통은 아무래도 ‘버려진 과거’의 느낌이 강하다.
‘오래된 현재’에 속하는 풍경들은 젊고 넉넉하고 기름지고 풍요로우며 따스한 공기로 넘쳐난다. 그곳에서 나는 올림픽의 도시 베이징을 선전하는 포스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선남선녀의 물결을 만난다.
그러나, ‘버려진 과거’의 풍경은 쓸쓸하고, 더럽고, 추울 뿐 아니라, 영화 <귀주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좁고 낙후하고 버려지고, 철거당하거나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세계다.
그리고, 이 버려진 세계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인물들은 중국, 아니 베이징의 9할을 점유하는 ‘사람들’, 즉 ‘인민’들이다. 그들의 삶은 우리들이 보았던 추억의 중국 영화 속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어째든, 잠은 자야되므로 나는 프론트에 연락해 방을 옮기고, 짐을 풀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호텔 지하 오리엔탈 플라자로 어슬렁어슬렁 내려갔다. 홍콩의 대부호가 지어 올림픽 축하 선물로 정부에 기증했다던, 아주 애국적인 이 상가는 한 눈에 척 보아도 유명 외국 브랜드들이 빽빽히 입점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야박하게 말해, 이 건물을 기증했다던 그 부호의 심중이든, 그것을 받은 국가의 심중이든, 그 심중에 든 것이 무엇일지 조금 헷갈렸다. 왜 그들은 이 애국적인 플라자에 자기네들의 고유 브랜드를 보란듯이 입점시키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그런 것을 묻는 것 자체가, 세계 자본주의화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당하고 세월 지난 질문일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황금의 궁이 있는 베이징의 아주 특별한 과거가 매일 밤 달이 조금씩 이즈러지듯 그렇게 슬금슬금 지워져 간다는 사실을 대면하는 것이, 명치 끝에 걸린 찰떡처럼 아프고, 손톱 및의 가시처럼 성가시며, 못난 며느리만큼이나 못마땅한 것을 말이다.
’부자’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그런 현실 속에서 또, 전국민을 부자 만들어 준다는 그를 대통령 만든 나라에서 살면서, 아직은 순진한 시골 청년같은 중국 앞에 그런 감정을 느끼다니.
우리는 얼마나 먼 길을 달려왔던 것일까. 우리의 88년 올림픽을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돈도, 땅덩이도, 자원도 없이 가난하던 우리, 가진 거라곤 멸사봉공, 자력갱생의 정신 밖에 없는 착하고 희생적인 국민이었던 우리가 88 올림픽을 전후하여 갈아입은 정신의 새옷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우리, 근대화를 마무리지었다는 적절한 자신감과 안락함에서 잠시 벗어나 중국을 큰 눈 뜨고 다시 바라보며 우리를 반추해 볼 일이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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