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정서 모르는 한인회

봉윤식 기자

한국 특검팀의 ‘검은 머리 외국인’ 발언에 대한 한인 커뮤니티의 분노가 점점 거세지고 있습니다. 시민권을 가진 한국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이라면서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곳마다 항의와 규탄의 목소리가 높아져만 가네요. LA와 뉴욕은 물론 워싱턴 등지에서도 한인회 차원의 공식 대응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일부에서는 이 같은 한인 커뮤니티의 반응을 과잉 대응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문제가 된 BBK 특검팀 문강배 특검보의 발언은 단지 김경준씨가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은유한 표현일 뿐, 해외 한인들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본래 ‘검은 머리 외국인’은 한국 증권가에서 불순한 목적으로 외국인 행세를 하는 한국 국적자를 의미할 때 사용되는 은어입니다. 김경준씨와 같은 한국계 미국인에게 쓰는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검은 머리’라는 말은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라는 속담에서 나온 것으로 사람을 배은망덕한 짐승에 비유하는 저속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냥 사기꾼에게 대통령이 놀아났다고 하면 되는데 굳이 그렇게 얘기한 이유가 뭘까요. 범죄의 주체로 특정 개인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집단을 지목,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의심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배은망덕하다는 이미지까지 줄 수 있으니 ‘검은 머리 외국인’은 외부의 적으로 삼아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엔 그야말로 안성맞춤입니다.

해외 동포들로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격입니다. 단지 거주국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수백만 한인들은 하루아침에 대한민국의, 그것도 배은망덕한 ‘적’이 됐습니다. 억울함을 참지 못한 이들이 하나둘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각 지역의 한인회가 이를 수렴, 동포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런데 유독 시카고만 이런 흐름에서 비켜나 있습니다. 전현직단체장 77명이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지만 정작 커뮤니티 대표 기관인 한인회는 뒷짐을 지고 수수방관 중입니다. 당분간 예의주시 하겠다는 게 공식입장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아예 처음부터 문제를 삼을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인회는 이 같은 항의 표시가 이명박 대통령이 시카고를 방문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오는 9월 이명박 대통령이 뉴욕 유엔에서 연설을 한다는 가정 아래 대통령의 시카고 방문을 추진할 계획인데 지금 한인회가 나서서 검은 머리 외국인 발언을 성토하면 ‘대업’이 성사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 정종하 한인회장은 만약 대통령이 시카고를 방문하면 문화회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겠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9월 뉴욕 방문이 구체적으로 잡힌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알아서 기는’ 한인회의 모습은 그저 안쓰럽기만 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문화회관보다는 한인들의 자존심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한인회가 간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화회관은 한인들의 정체성과 자부심만 유지된다면 언젠가는 지어지겠지만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전락한 한인들의 자존감은 쉽사리 회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기자가 지난 20일 청기와식당에서 만난 전현직단체장 중 하나는 문제의 발언을 성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있는 한인 1세들 중에선 6.25 전쟁 때 참전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도 한국에서는 단지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게 참 서운하고 억울하지요. 그런데 더 화가 나는 건 우리 손으로 뽑은 우리의 대표가 해야 할 말은 못하고 눈치나 보고 있다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이 어째 우리 늙은이들보다 생각이 더 고루합니까...”

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