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끊임없이 대중과 호흡하는 ‘창조적 몽상가’
1월 29일로 백남준(1932~2006)의 타계 4주년을 맞는다.
최근 독일의 ‘마나거마가진’이 앤디 워홀, 요제프 보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 기라성 같은 현대 작가들과 함께 ‘위대한 작고 현대미술 작가 10명’으로 선정했을 만큼 그는 세계 미술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한인 아티스트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아무리 간단히 정리한다고 해도 한정된 지면에 그의 깊고 넓은 예술 활동을 담을 수는 없다. 동료 예술가들과 그를 연구했던 사람들의 짧은 말들을 통해서나마 여전히 우리곁에 있는 것 같은 백남준을 잠시 생각해본다.
경기도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 이영철 관장은 지난해 센터에서 열렸던 국제세미나에서 백남준을 진폭이 큰 예술가이자 창조적 몽상가, 달에 홀린 광대”라고 표현했다. “그는 달과 인연이 깊다. 백남준은 달빛아래서 강물처럼 흐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시 ‘월인천강지곡(악장체 1568)’을 좋아했다. 달은 천개의 강을 비추는 ‘부처’를 뜻하고 강은 ‘민중(중생)’을 뜻하다. 달빛에 어린 광대인 이 천재 예술가는 거기서 놀기를 좋아했다.
그의 대표작 67년작 ‘달은 가장 오래된 TV’ 제목이 얼마나 멋진가. 요즘은 진짜 TV를 보지만 과거에는 달 TV보며 정월대보름과 한가위를 즐기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TV가 없기에 각자가 스스로 대본을 만들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낭만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시대인지 모른다“
1960년대 독일 전위예술계의 프리마돈나였고 백남준의 애인 같은 친구였던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도 세미나에 참가했다. 그녀는 백남준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우리는 젊었을 때 만났다. 여기서 나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그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대단한 정신이었고 철학자였고 음악가였고 예술가였고 장인이었고 퍼포머(행위예술가)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
81년부터 96년까지 16년간 함께 작업했던 뉴욕의 아티스트 폴 개린은 백남준을 “매일 매일 새로움을 추구했던 예술가”로 기억한다. 또한 그가 세계의 유수 경제지를 탐독하는 등 남다른 경제 관념이 있었다고 다소 의외의 사실도 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남에게는 “맨하탄에 아파트 한 채 사둬, 돈 벌거야”라고 권하면서도 그의 예술은 결코 돈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소유할 수도 없다. 그의 작품은 결코 자본적이지 않았다.
백남준은 한국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지식인들이 그랬듯 초기에는 마르크시즘에 심취했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만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한국경제를 살리는 것은 재벌이 아니라 남대문, 동대문시장 사람들이다.
알재단 강사로 지난주 백남준의 TV부처를 주제로 강연했던 뉴욕시립대 김지혜씨는 “TV를 비롯한 영상매체를 이용해 작업하는 모든 작가들, 행위예술이나 소리 혹은 음악을 시각예술의 영역으로 들고 들어온 모든 작가들은 백남준에게 일정량의 빚을 지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 그와 대화를 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설명한다.
“백남준이 후대 예술가들에게 남겨준 가장 큰 업적은 새로운 매체의 사용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매체를 실험하고 해체함으로써 기존의 사고방식, 예술의 정의, 장르의 구분을 전복시키려는 지치지 않는 노력만이 예술가들이 현실 세계에 개입하고 예술을 아는 사람들만의 예술이 아닌 일반 대중들과 호흡할 수 있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전략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뉴욕주에 거주하는 안성숙씨는 고인과 20년이 넘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1980년대 초 뉴욕의 한인 미술계가 겨우 발돋음을 하고 있었을 무렵, 뉴저지에서 조그만 화랑을 운영하고 백남준에게도 개업 엽서를 보냈더니 정말 전화가 왔다. “그 유명한 사람의 전화를 직접 받은 것이 사실 같지가 않았어요. 백남준 씨가 지금 뭘 하고 있어요 라고 묻자 당황해서 스피노자를 읽고 있는데요라고 대답했고 백남준 씨는 그것을 기억하여 자주 그 말을 했습니다.” 안씨는 ‘백남준 아트센터’의 건립에 깊이 관여했고, 스미소니안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내에 ‘백남준 아카이브’와 협력하여 일하고 있다.
그에 대한 존경은 어쩌면 미술에 몸담고 있지 않은 일반인의 다음과 같은 마음에서 더 각별히 느껴진다.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존경)은 끝없이 내 마음에서 샘솟는다. 나는 그에게 빚지고 있다. 나는 백남준이라는 ‘문화은행’에서 한국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대여 받고 있다. 아무런 이자도 받지 않고 그것이 공짜이니 정말 미안하다. 그는 일본에 가면 ‘일본의 백남준’이 되고 독일에 가면 ‘독일의 백남준’이 되고 미국에 가면 ‘미국의 백남준’이 된다. 프랑스가 백남준을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다. 그는 그렇게 온 인류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세미나에 참석했던 김형순 씨. <박원영 기자>
2009년 첼시 제임스 코한 갤러리에서 열린 백남준 특별전 모습
■ 백남준의 뉴욕 데뷔 무대
첼리스트 샬로트 무어맨과 ‘로보트 오페라’ 공연
과다노출 경찰 체포 외설죄로 유예선고 받기도
백남준이 뉴욕에 정착한 것은 1964년이었다. 일본서 6년간 미술공부를, 독일에서 7년간 음악공부를 한뒤 TV와 비디오등 전자영상에 관심을 갖고 당시로선 미개척 분야였던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인물로 이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전위예술의 메카인 뉴욕으로 오지 않을수 없었다. 그의 뉴욕 데뷔 무대는 클래식 여성 첼리스트 샬로트 무어맨과 공연한 ‘로보트 오페라’ 였다.
저드슨 홀에서 열린 제2회 뉴욕 전위음악제의 한 파트로서 실연된 오프닝은 그가 일본에서 제작해 온 ‘로보트 K-456’를 통해 케네디 대통령의 1961년 취임사를 담은 오디오 테이프를 들려주어 미국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1967년작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는 더욱 큰 주목을 받는데 성공했다. 첼리스트 샬로트 무어맨과의 과대노출 부분이 문제가 되어 경찰에 체포된 나머지 외설죄로 유예선고를 받았다. 1969년에 들어서면서 비디오 아트는 전시회나 TV방송 분야에서 점차로 중요시 되면서 제대로 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 조류를 타고 백남준은 급성장할수 있었다.
WNET-TV(채널 13) 연구실의 상임예술가로 한동안 일하면서 ‘지구의 축’, ‘조곡 212’, ‘뉴욕의 판매’등 여러 작품들을 내놓았다. 계속해서 비디오 조각, 비디오 테이프로 전시회를 가졌고 1971년에는 휘트니 미술관 최초의 비디오 테이프 전시회에 그의 작품이 포함되어 미술사에 기록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뉴욕정착 7년만에 그는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서 정상에 앉게된 셈이었다.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라는 별명도 따라붙었다.
<자료제공=조종무.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뉴욕 데뷔 무대인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연습을 하고있는 백남준과 첼리스트 샬로트 무어맨, 그리고 로보트 K-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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