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메일을 체크하다가 ‘스테파니 블룸버그’라는 낯선 이름이 눈에 띄었다. 당최 알 수없는 사람이었다. 영양가 없는 보도자료를 막무가내 살포하는 정부기관의 PR 담당자들 중 하나려니 생각하고 건성 열어봤다가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20여년전 LA에서 필자와 함께 일했던 김 모 여기자였다. 필자도 잘 아는 첫 남편과 오래전에 헤어져 미국인과 재혼한 후 이름을 완전히 미국식으로 바꿨다고 했다. 그녀는 현재 직업이 소셜워커라며 최근 한 언론기관이 보내온 그룹메일의 기다란 주소록을 무심코 들여다보다가 뜻밖에 필자의 이름을 발견하고 반가워서 편지를 보낸다고 했다. 필자는 이름을 이메일 주소로 사용한다.
우리 주위에 미국식 이름을 가진 한인이 적지 않다. 폴 신(신호범), 마이클 박(박영민), 신디 류(김신희) 등 올해 선거의 한인후보들처럼 주류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미국식 이름을 선호한다. 기독교 신자가 많아선지 폴 외에 존, 피트, 제임스, 스티브, 요셉, 사무엘, 데이빗, 메리, 한나, 에스터 등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 많다.
물론, 2~3세들은 거의 100% 미국식 이름이다. 1세들처럼 고리타분(?)하지 않고 참신하다. 딸은 이사벨라·에마·올리비아·소피아·아바·에밀리·매디슨·애비게일·클로·미아, 아들은 제이콥·이썬(Ethan)·마이클·알렉산더·윌리엄·조슈아·대니얼·제이든·노아·앤소니 등 요즘 미국인 부모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남녀 10대 인기이름이 대세를 이룬다.
1세 한인여성들은 이민 온 후 운전면허나 소셜시큐리티 신청, 은행구좌 개설 등의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남편 성으로 바뀐다. 딸도 출가하면 남의 성이 돼버린다. 그나마 남자들은 이름만 바꾸기 때문에 절반은 알아볼 수 있지만, ‘스테파니 블룸버그’의 경우처럼 성과 이름이 통째로 바뀐 여성들은 얼굴을 보기 전에는 식별하기 어렵다.
우리는 미국이 아닌 모국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성을 강제로 바꿔야 했던 서글픈 역사가 있다. 일제통치 말기의 소위 ‘창씨개명’이다. 일본인들은 성(性)을 씨(氏)로 표현한다. ‘창씨개명’은 ‘새로 성을 만들어 이름을 바꾸라’는 뜻이다. 한국의 전 대통령들 중 박정희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김대중이 ‘도요타 다이주’(豊田大中), 김영삼이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라는 일본이름을 가졌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이명박 현 대통령도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라는 일본이름을 가졌었다는 소문이 있다.
물론 우리의 선대는 조상전래의 성을 지키기 위해 창씨개명에 적극 항거했다. 지금도 ‘성을 간다’는 말은 한국인들에겐 지독한 욕이다. 하지만, 미국에선 성이 아닌 이름을 간다. 자랑이요, 축복일 수 있다. 미국시민임을 간접적으로 과시하는 수단이다. 필자의 한 친지는 시민권취득 때 기회를 놓치고 나중에 법원에 찾아가 수수료를 내고 개명했다.
이민연륜이 길어지면서 ‘성을 가는’ 풍속도도 달라지고 있다. 특히 전문직이거나 주류사회에서 폭넓게 활동하는 한인2세 여성들은 미국여성들처럼 결혼 후에도 자기의 본래 성을 지키거나 남편 성과 본래 성을 겸용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필자의 한 선배 여기자는 본래 성인 임(Yim)을 미들네임으로 쓰고 그 뒤에 남편 성인 ‘Lee’를 쓴다.
이들의 고민은 처녀 때 본래 이름으로 애써 쌓아올린 경력이 결혼 후 성이 바뀌는 바람에 공중분해 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여권, 운전면허, 소셜 시큐리티, 유권자등록, 은행구좌, 크레딧카드 등 이름을 고쳐야할 곳이 부지기수인 것도 ‘성 가는 것’을 꺼리는 이유다.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여성들이 결혼 후에도 성을 갈 필요가 없는 한국이야말로 여성인권이 최고로 보장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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