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병으로 참전 MD 거주 빈센트 크렙스씨
“한국 전쟁에서 나보다 2분 늦게 태어난 쌍둥이 동생 리처드를 잃었지만 한국이 자유와 민주주의 토대위에 번영하는 것을 보면서 전쟁에 참전했다는것이 자랑스럽다.”
빈센트 크렙스(79, 메릴랜드 타우슨스 거주)씨는 “60년 전인 1950년 8월 16일 동생과 같은 미 2사단 소속 보병으로 부산에 도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면서 “동생도 우리가 싸운 전쟁으로 인해 한국이 이처럼 발전한 것을 보면 무척 자랑스러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등병이었던 크렙스 씨는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전선을 사수하라(Stand to die)’는 명령을 받고 낙동강 전선으로 배치된다.
크렙스 씨는 “동생과 나는 다른 분대(Squad)에 배치돼 낙동강 전선으로 갔고 9월 1일 도하해서 북상하려했으나 북한군이 내려오는 바람에 후퇴했었다”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과 유엔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우리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고 회상했다.
크렙스 씨는 50년 10월 중순경 낙동강전투에서 얼굴과 팔, 다리에 부상을 당해, 일본으로 후송됐다가 12월 초 다시 전선으로 배치된다.
동생 리처드 일병도 이해 9월 낙동강 전선에서 부상을 입었으나 10월 한국으로 다시 배치돼 평양으로 진군했다가 중공군에 의해 포로로 잡히게 됐다.
동생 리차드 일병이 평양 북쪽 45마일 지점에서 실종자가 됐다는 소식만 듣고 51년 1월 19일 한국을 떠났던 크렘스 씨는 이후 동생 소식을 알기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했지만 허사였다.
크렙스 씨가 동생 소식을 알게 된 것은47년이 지난 1998년. 동생과 함께 중공군에게 포로가 됐던 미군 참전용사가 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려줬다. 크렙스 씨는“그 참전용사는 중공군은 동생이 1951년 6월 21일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아마 그 전에 죽은 것으로 안다고 말하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크렙스 씨는 동생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98년 10월 미 국방부의 주선으로 북한을 방문했고 이어 같은 해 12월 한국도 찾았다.
“한국과 북한을 방문하면서 내가 싸운 한국전쟁이 얼마나 값있는 전쟁인지 알 수 있었다”는 크렙스씨는“한국은 자유와 민주주의 토대위에 번영했었지만 북한은 정반대였다”며 한국의 발전상에 놀랐던 당시를 회상했다.
크렙스 씨는 1999년 한국전 참전용사 한국 방문 프로그램인 ‘한국 재방문(Revisit Korea)’을 통해 재차 한국 땅을 밟고 나서 “동생도 살아있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1949년 9월 2일 입대했다가 1952년 12월 중사(Sergeant First Class)로 전역한 크렙스 씨는 지난 2007년 11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One Came Home)’이라는 책자를 발행,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 한국전쟁을 알렸다.
<이창열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