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이 애용한 조국 상징물
3) 단체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대형 태극기 이외에 소형 태극기를 든 한인들의 사진은 1914년부터 볼 수 있다.
1914년 2월 2일에 국민회 창립 5주년 행사를 치루면서 개인용 소형 태극기를 제작한 것 같다.
창립기념 행진을 바라보는 군중들이 손에 소형 태극기와 대형 성조기를 든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기념행사의 하나로 저녁에 오페라 하우스에서 ‘예술행사’ (공연)가 있었는데, 이 때 13명 부인들이 흰 한복을 입고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나와, “조선아, 조선아 우리 조선 주인을 찾아 돌아오라”고 노래를 불렀다.
13명의 부인은 조선의 13도를 상징하였는데, 소형 태극기를 든 그들의 단체 사진 두 장이 남아 있다.
태극기와 태극문양은 한인들의 출판물에서도 볼 수 있다.
1904년 11월부터 하와이 감리교선교부와 한인 감리교회가 『포와한인교보』라는 월간 교회 소식지를 등사판으로 발간하여 각 농장으로 보냈다.
1906년 5월에는 한국에서 식자기를 들여와 좀 더 나은 월간지를 출간하였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교회보 중 제일 오래된 1907년 9월호 겉표지에 태극 문양 4개와 성조기와 태극기가 두 쌍식 그려져 있다.
이 『포와한인교보』가 1913년에 재정문제로 폐간될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이승만은 해결책으로 기존의 『포와한인교보』에는 성경공과 등만을 실어 감리교 선교부가 출판비용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일반 소식이나 일반 내용물은 따로 월간지『태평양잡지』에 담아 출간하여 실었다.
새 월간지 출판 비용은 이승만이 한인들의 협조로 감당하였다. 이승만은『태평양잡지』 영문판 뒤표지에 성조기와 태극기를 넣었다 (사진 위).
이보다 앞서 카우아이 섬에 조직되었던 자강회(自彊會)가 1907년 9월부터 월간지『自新報』를 출간하면서 앞 표지에 성조기와 태극기 그리고 대한제국 지도를 넣었다.
이민자들은 출판물 이외에 회원증서, 주식증서, 영수증 등에도 태극문양을 넣어 대한인임을 잊지 않았다. 1909년 국민회 회원증에 태극문양과 무궁화 문양이 인쇄되어 있으며, 1918년 국민회 의무금(회비) 증서는 무궁화 문양으로 테두리를 둘렀다
1921년 7월에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임시정부를 옹호하며 교포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동지회를 조직하였다.
동지회는 1924년에 실업부(實業部)를 두고 한인들의 경제력을 개발하기로 하였다.
실업부는 1주에 100달러씩의 주식을 팔아 자본금 5만 달러를 모집하여 동지회 합자회사를 설립하기로 하고, 1925년 12월에 동지식산회사를 창립하였다. 동지식산회사 주식증서에 한 쌍의 태극기가 들어있다 .
동지식산회사는 하와이 섬에 동지촌을 개간하여, 농업, 목축, 제재업, 숯 제조 등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으나 자본금 부족으로 6년 만에 파산하였다. 동지회가 운영하던 동지식산회사는 파산하였으나, 동지회는 그대로 존속하여 아직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동지회는 1938년에 동지회에 호상부를 조직하여 회원이 상(喪)을 당하였을 때 장례비용을 지급하였는데, 호상부원증에 한 쌍의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사진 아래).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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