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머리 소년 로꾸거가 뒤로 걷는다
찰방찰방 빗길을 걷는다
구두 가게로 들어간다
구두를 벗어주고 돈을 받아 나온다
이발소 뒷문으로 들어간다
머리를 길게 길러서 앞문으로 나온다
죽음이 웃는다 죽음은
카페 창가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체크무의 넥타이를 매고 있다
횡단보도 앞에서 소년이 묻는다
아저씨 거기서 뭐 하세요?
죽음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도 네 아빠처럼 샐러리맨이야
오늘 밤 아들에게 살해될 한 노인을 기다리는 중이야
요즘은 일이 많아 매일매일 야근이란다
소년은 횡단보도를 건넌다
신호가 바뀌자 차들이 일제히 뒤로 달린다
빗방울은 하눌로 떨어지고
달랑달랑 불알을 흔들며 저녁이 온다
담배가 점점 길어진다.
- 함기석 시인(1966 - ) ‘나른한 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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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앞으로 가지 않고 갑자기 뒤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로꾸거’ 소년처럼 우리는 모두 ‘거꾸로’ 움직이고 있는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빗방울은 하늘로 떨어지고 과거는 미래가 돼 다가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누구나 젊어져 아들에게 살해될 한 노인을 기다리던 죽음은 결국 일을 잃게 될 것이다. 마음껏 펼쳐지는 상상의 세계가 아이들의 그것처럼 싱싱하고 유쾌하다. ‘어른을 위한 동시’라고 이름 붙여도 될 법하다.
<김동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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