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던 젊은 시절에는 해마다 찾아오는 짧은 2월이 오면 기뻐하곤 했다.
“정, 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어린시절 동네 친구들과 흙바닥 운동장에서 이 노래로 진종일 고무줄놀이를 했던 적도 있다.
이제 반세기도 훨씬 넘게 세월은 흘러갔고 노년의 세대에 폭 끼어있는 나에게 올해의 2월은 지루하고 매력 없는 기나긴 한 달이었던 것 같다.
5년전부터 우리 부부는 중·남미의 열대산악 우림지대에 생존하고 있는 가난한마야 인디오들을 위해 자원하여 일년이면 반년 좀 넘게 여름, 겨울 두 번 이상씩 사역하며 집을 떠나 있곤 해 왔다. 올해는 나이를 실감하는 시니어의 체질 약화로 인해 예년에 비해 한 달 앞당겨 지난 1월말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일기차가 갑자기 큰 탓이었는지 그 다음날로 남편과 함께 덜컥 감기가 걸려 두 주째 고생했다.
내 집에 와서 몇 달 만에 맛보는 세끼 밥이 아니라 생강차, 삶은 고구마, 코프시럽이 식탁을 대신 차지했다. 바로 얼마전만해도 라틴아메리카의 부서질듯한 밝고 따가운 햇살은 찾을길 없고, 어제 오늘은 겨울안개비가 부슬부슬 뿌리며 온통 바깥세상은 지저분한 잿빛으로 가득 시야를 거스린다.
그립기만 했던 손주들도 행여 감기가 옮겨갈까 만나보지도 못하고…. 자꾸만 센티멘탈 해지는 길고도 미운 2월이다.
겨우 오늘에서야 이게 아니지 싶어 자리를 박차 새벽부터 탕 목욕을 따끈하게 하고 가구청소용 스프레이를 손에 쥐었다.
우선 TV와 주변의 먼지를 닦아내고 그 아래 장속에 가지런히 들어 차 있는 오디오시스템을 조심스레 앞으로 밀어내다가 손가락 하나가 버튼하나를 잘못 건드렸는지 갑자기 FM라디오 사인이 반짝거리며 클래식 음악이 고요했던 온 집안에 울려 퍼지는 게 아닌가.
지금은 제목조차도 다 잊어버린 베토벤의 로맨틱한 피아노 소나타임에 틀림없다. 경쾌한 리듬이 집안을 환하게 하며 새로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듯하다. 마른 걸레질을 잠시 멈췄다. 아, 얼마만인가?
15년 전 쯤 큰아들이 보너스를 받았다며 연말에 그 무거운 오디오 세트를 차에 싣고 뉴욕에서 달려와 거실에 설치해 주고 바쁘다며 내가 해준 밥한끼도 못먹고 날라가듯 훨훨 되돌아 사라져 갔다.
그 당시 나와 남편은 다가올 은퇴시기를 계획하며 모든 일을 성실히 마무리 짓고자 더욱 바빴고 고달픈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감히 소파에 여유 있게 앉아 음악CD 한 장 끼워 넣을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지금까지도 이 음악기구를 사용했던 때 보다는 쌓인 먼지 닦아 냈던 횟수가 몇 십배, 몇 백배였으리라. 이제는 세딸의 아빠가 된 그 아들에게 새삼 미안한 마음이 몰려온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또 다른 곡으로 이어지고 대충 집안 청소를 끝내고 레몬차 한잔 들고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이제 2월도 반이나 넘어 간다. 곧 내 감기도 떨어져 나갈 것이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3월이 오면 큰며느리 생일 케잌 싸 들고 나의 짝사랑 세 손녀딸과 랑데부하러 뉴저지로 달려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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