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생 39시간 만에 떠난‘ 막내 아들 패트릭 보비어’ 이야기
▶ 예정일보다 5주 반 앞서 재클린이 제왕절개로 조산 ‘신생아 호흡곤란증’겪다 결국… 현재라면 95% 생존률 케네디 몰래 오열…몇달 후 자신도 총성 속에 스러져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딸 캐롤라인과 함께 막내아들 패트릭 보비 어 케네디의 묘로 향하고 있다. 패트릭은 태어난지 39시간만에 신 생아 호흡곤란증으로 1963년 8월9일 보스턴 칠드런스 하스피틀 에서 숨졌다.
1963년 8월7일부터 8월9일 사이의 39시간 동안 미국인들의 관심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한 조산아에게로 집중됐다.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예정일보다 5주반 앞서 모태 밖으로 나온 조산아의 이름은 패트릭 보비어 케네디였고 그의 아버지는 당시미합중국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였다.
1963년 8월7일 케이프 카드의 오티스 공군기지에서 출생한 패트릭의 체중은 4파운드10.5 온스로 조산아치고는 건실했다.
그는 19세기 이후 미국의 현직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기였지만 세상은 그를 환대하지 않았다. 엄마인 재클린의 몸에서 분리된 직후 패트릭은 호흡장애를 일으켰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그를 치료했던 세 명의 의사를 통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패트릭은 태어난 지 39시간 만에 조산아들에게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신생아 호흡곤란증후군으로 숨졌다.
당시 세포막 질환으로 알려졌던 이 증상은 조산아들의 최대 사망원인이었다. 호흡곤란으로 사망한 조산아들만도 연 2만5,000명에 달할 정도였다.
조산아는 폐에 형성된 유리처럼 매끄럽고 투명한 세포막이 산소가 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호흡장애를 일으켜 사망하게 된다.
그때만 해도 신생아 호흡곤란증후군을 치료할방도가 거의 없었다. 그저 따듯한 인큐베이터 안에서 정성스런 간호를 받는 것이 전부였다.
아기가 자력으로 48시간을 버티면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패트릭처럼대부분이 호흡장애로 지상에서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조산아로 태어나 마의 48시간을 버텨낸 유명인사로는 아이작 뉴턴, 앨버트 아인스타인, 피카소와 윈스턴 처칠 등이 꼽힌다.
재클린 케네디의 출산기록은 그리 좋지 않다.
한 번 유산을 했고 딸을 사산했다. 패트릭이 잠깐이 세상에 왔을 때 그녀에겐 딸 캐롤라인(5)과 아들 존 주니어(2)가 있었다.
패트릭이 태어난지 몇 시간 안 돼 재클린의 산부인과 주치의인 존 월시 박사는 하버드 부속병원인 보스턴 칠드런스 하스피틀에 전화를 넣어 소아과 수석 수련의인 제임스 휴즈 박사와 통화했다.
처음에 장난전화로 오해해 ‘대형사고’를 칠 뻔했던 휴즈는 부랴부랴 소아과 전문의인 제임스드로보에게 연락을 취했고, 드로보 박사는 그날일정을 모두 취소한 후 급히 헬기에 올라타 오티스 공군기지로 날아갔다.
그를 직접 맞아들인 케네디 대통령은 신속한진찰을 요구했다.
패트릭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드로보는 패트릭을 즉각 보스턴으로 이송할 것을 권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보스턴 칠드런스 하스피틀의필요한 시설과 인력을 모두 오티스 기지로 옮겨올 수는 없는지 물었다. 드로보의 대답은 “절대불가”였다.
대통령의 아들은 곧바로 보스턴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기본시설과 장비에 해당하지만 그 당시만해도 신생아 중환자실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조산아에게 인공호흡기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때가 여름 휴가철의 정점인 8월이었다. 보스턴 병원의 고참 의사들은 모두가 휴가 중이었다. 따라서 패트릭에게 배정된 또한 명의 의사는 보스턴 병원의 소아심장과 훈련의인 우레턴 게르소니였다.
현재 모간 스탠리 칠드런스 하스피틀의 소아심장학 과장인 게르소니 박사는“ 아직 연조가 새파란 보스턴의 의사들은 잔뜩 위축된 상태에서 긴급 공수된 대통령의 조산아를 치료했다”고 털어놓았다.
당황한 병원 측은 케이프 카드에서 휴가를 즐기던 게르소니의 사수 알렉산더 나다스 박사를불러들였다. 헝가리 태생으로 P를 V처럼 발음하는 나다스 박사는 8월8일 병원에 도착했다. 패트릭의 호흡은 더욱 가빠진 상태였다.
그녀는“ 브레지던트를 만나야겠다”고 말했다.
나다스 박사를 따라나섰던 게르소니는 “햇빛에 검게 그을린 케네디 대통령은 매우 침착했고,정중했고, 멋있었다”고 회고했다.
나다스 박사의 소견을 경청한 케네디 대통령은“그가 정신박약아가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몇번 대답을 회피하던 나다스 박사는“ 대통령님, 우리는 지금 아이의 생명을 구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더 이상 같은질문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이때 백악관 공보관인 피에르 샐린저가 케네디의 처제 리 라즈윌의 메시지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서둘러 맨해턴의 유명 소아과 전문의인 새뮤엘 리바인 박사를 수배하라는 내용이었다. 리바인 박사는 라즈윌의 조산아를 돌보았던 의사였다.
즉각 리바인 박사를 찾으라는 특명이떨어졌다. 뉴욕 센트럴팍에서 새뮤엘 박사를 찾아낸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은 다짜고짜 그를 대통령 앞으로 데려갔다.
리바인 박사는 대통령에게 “정부의효율성에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말했고 미국 의학협회와 오랜 정치적 전투를 치러낸 케네디는 “이제 의사들도효율성에 대해 배워야할 시간”이라고 받아쳤다.
보스턴 칠드런스 하스피틀은 조산아의혈중산소를 높이기 위해 하이퍼배릭 체임버라는 압력기구를 사용하고 있었다.
앞서 다른 조산아들에게 두어 번 사용해 보았지만 효과를 얻지 못했던 치료법이다. 하지만 달리 해줄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성사를 운에 맡기는 이른바‘헤일 메리’ 장거리 패스였다.
압력 인큐베이터의 유리막을 통해 대통령은 말없이 아들을 지켜보았다. 8월9일 새벽, 패트릭은 영면에 들어갔다.
대통령은 주변사람들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후일 그의 측근들은 회고록을 통해병원에 마련된 전용실에서 대통령이 오열했다고전했다.
패트릭이 불러일으켰던 전국적인 관심은 그로부터 수개월 후 달라스에 울려 퍼진 총성에 밀려안개처럼 소멸됐다. 케네디의 죽음이 아들의 죽음을 덮었다.
현재 패트릭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당시 그의 죽음은 조산 연구에 관한 지대한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후 10년 남직한 세월에 걸쳐 대담하고 성공적인 조산아 치료법이 개발됐다.
의학자들은 특히 신생아 호흡곤란증후군이 폐의 공기주머니를 덮고 있는 계면활성제의 부족에기인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신생아학이라는 새로운 의료분야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합병증을 일으킨 조산아들은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신생아 병동에서 수개월을 지내야 한다. 게다가 후일 신경기능이나 인지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얼마나 오랫동안 신생아 치료를 제공할것인지를 둘러싼 윤리적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패트릭이 1963년 8월이 아니라 2013년 8월에 태어났다면 그가생존할 확률이 95% 이상이라는 점이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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