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정복은 전문 산악인들의 필생의 꿈이다. 지난 2005년 8,848m의 세계최고봉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이름)에 도전하기로 신년 결의한 산사나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란 건 기록도, 명예도, 보상도 아니었다. 죽음의 빙벽에 매달려 1년째 잠들어 있는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는 게 목표였다. 한국영화 ‘히말라야’는 그 가슴 뜨거운 도전을 그렸다.
엄홍길(황정민 분)이 이끄는 휴먼 원정대는 그해 3월 현지로 떠나 77일 만에 박무택(정우 분)의 시신을 찾았다. 그는 전해에 계명대학 원정대장으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고 내려오다가 설맹으로 목숨을 잃었다.
“산을 올라갔으면 내려 와야제, 거기서 와 삽니까?”라던 그는 끝내 내려오지 못한 채 양지바른 돌무덤에 묻혔고, 원정대는 신년 결의를 실현하지 못했다.
시애틀에서는 지난 2일 아침 ‘이사콰 알프스 3연봉’의 최고봉인 타이거 마운틴에 한인 50여명이 줄지어 올라갔다. 높이가 에베레스트의 10분의 1 정도인 ‘야산’이지만 트레일 상반부는 얼음이 깔려 짐짓 에베레스트의 크레바스를 건너듯 등산화에 크램폰(아이젠)을 끼고 조심조심 걸어야했다. 정상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설맹 현상은 없었다.
서북미 한인사회의 가장 큰 등산단체인 시애틀 산악회는 매년 첫 토요일 호랑이산에서 회원들 간의 친목과 단합을 다지고 한해 동안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을 기원하는 신년등반 행사를 갖는다. 개인적으로 신년 결의를 굳히기도 한다.
신년 결의는 대부분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 금주, 체중감량 등 건강에 관한 결의는 꼭 1월1일에 할 필요가 없다. 산상결의도 그렇다. 한 친구는 지난해 신년 등반 때 매 주말 등산하겠다고 산상결의 했지만 그 다음 주부터 안 나왔다.
동료 시신 수습에 나선 엄홍길 일행처럼 최선을 다하고도 불가항력의 여건 때문에 신년결의 구현에 실패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도 ‘뱃살 빼기’가 십수년 째 신년결의지만 별 진전이 없다. 미국 성인들 3명중 2명이 과체중이므로 신년결의가 나와 비슷할 것 같은데, 아니다. 군살빼기는 세 번째다. 건강을 위한 규칙적 운동이 두 번째고, 첫 번째는 ‘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이다.
금연, 금주, 크레딧 빚 청산 따위는 훨씬 뒤로 쳐진다. 실행하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들이다.
그래서 신년결의보다 신년소망이 덜 부담스럽다. 시애틀타임스는 매년 연말 ‘내년에 읽고 싶은 기사제목’들을 공모해 1월1일 발표한다. 올해 선정된 것들 중에는 ‘유권자들, 트럼프 퇴출’ ‘스티브 발머, 클리퍼스 프랜차이즈 시애틀 이전’ ‘시혹스, 50회 수퍼보울서 패트리어츠에 설욕’ ‘시애틀에 차 없는 거리 등장’ ‘사형제도 결국 폐지’ 등이 포함됐다.
한인들이라면 아마 올해도 ‘경기회복’(주류사회 수준)을 첫 번째로 꼽았을 듯싶다. 그밖에 ‘워싱턴주 한인인구 폭증’ ‘주의회에 또 한인정치인 입성’ ‘시애틀-벨뷰 통합한국학교 자체 건물 확보’ ‘한인학생, 워싱턴대학 합격 신기록’ ‘매리너스, 한국선수 영입’ ‘총영사관 신축공사 순탄’ ‘한국일보 불우이웃 돕기 성금 10만 달러 돌파’ 등이 포함됐음직하다.
하지만 한인들의 실제 신년소망은 한결같이 평범하고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들이다. 온 가족이 건강할 것, 비즈니스가 잘 될 것, 자녀 결혼, 신앙생활 정진, 모국방문 따위이다.
영화 ‘히말라야’에서 엄홍길은?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후다닥 내려오는 게 정복이냐? 신이 허락하셔서 잠깐 머물다 내려가는 거다”라고 말한다. 원숭이는 재주가 많지만 교만이 흠이다. 그래서 나무에서 떨어질 때도 있다. 손오공은 하늘 높이 날았다고 자만했지만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 화두로는 겸손이 적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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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 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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