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점) 치는 노인과 便桶(편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시인 이성복의 <그 날>이란 시이다. 고통에 익숙해진 가여운 현대인의 모습을 이 처럼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피로와 스트레스를 삶의 당연한 한 부분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소비와 소모, 생산만을 강요당하는 삶에서 어쩔 수 없는 부산물 정도로 생각하도록 만들어진 사회에서 우리가 자연스레 갖게 되는 태도일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니 더더욱 애처로워진다.
고통에 대한 공동체적 침묵. 왠지 부당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우리는 왜 서로의 고통, 더 나아가 자신의 고통을 당연시하며 그에 응당한 위로와 회복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일까.
현실 부정만으로는 결핍과 허전함을 채울 수 없다. 아무리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체면을 걸어 봐도 실제 상황적 반전은 쉬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
한 사람의 감정은 그와 함께 나이를 먹는다. 인생에 대한 태도 역시 그렇다. 감정과 태도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다소 넓어지거나 깊어진 마음의 크기를 스스로에게 또 서로에게 기대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공동체의 슬픈 고백에, 어제만큼의 나이가 든 우리의 정신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는 타인의 일에 대한 적절한 감정이입일지도 모르겠다.
이 일에 ‘사랑’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찾을 필요는 없다. 공감에 뿌리를 둔 ‘연민’만으로도 우리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적절한 책임감을 지켜낼 수 있다. 더욱이 이 일은 훗날 타인의 이해와 위로가 필요할지 모를 자신의 일에 대한 효과적인 보험이 될 수도 있다.
이 시인은 또 다른 글에서 인식은 “상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실제 아픔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참된 인생의 맛은 체감되기 마련이다.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아픔과 상처가 더욱 깊고 긴 여운을, 그리고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험된 맛은 비슷한 타인의 경험으로도 쉽게 상기되어, 상대방에게 필요한 용기를 전달할 수 있는 지혜를 심어준다.
‘남’의 일에 호들갑을 떠는 것을 그저 나무라기만 해야 할까. 그런 일에 잦게 출몰하는 그 사람이 실은 그 마음 깊은 곳에 너무나 많은 아픔들을 가지고 있고, 그와 비슷한 누군가를 위로하고자 하는 가슴 뜨거운 누군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짐작을 조심스레 하게 된다.
<
노유미 번역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