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거려니 했다. 아버지가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도망나왔으나 휴전 후 부역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할 뻔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나 육군 중사로 참전한 작은 아버지의 다리 총상 흔적을 볼 때도 전쟁이 그런거다 싶었다. 큰어머니는 충북 보은의 산골 살티재라는 곳에서 고구마를 팔며 큰아버지와 시동생들을 기다렸다고 했다. 어머니는 여섯살, 네살 형님과 갓난 셋째 형님을 둘둘 말아 1.4후퇴를 견뎌내셨다. 포탄이 바로 옆에서 떨어져 터지는 와중에도 살아 남아 훗날 미국까지 와서 돌아가셨다.
전쟁 직후의 세대는 빨갱이 원수와 중공군, 소련을 각인시키는 반공교육과 방첩을 배우고 주변에 널린 상이용사들의 구걸을 보며 자랐다. 미군에게서 검이나 사탕을 얻어 먹은 기억도 있다. 가슴에 다는 리본은 필수였다. 반공, 방첩부터 승공, 상기하자 6.25, 재건합시다 등 다른 내용의 표어가 여러 장 담긴 비닐 리본이 문방구에서 인기였다. 산에서 빠라를 주워 신고하면 학용품을 받을 수 있었다. 첨예한 냉전, 무장공비 사건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했다는 영웅소년 이승복을 탄생시켰다. 당연히 믿겨지는 스토리였다.
한국전쟁은 굵직하고 단순했다. 유엔결의안에 따라 16개국이 참전했고 낙동강에 최후 전선을 그은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북진을 거듭했다. 중공군의 개입과 1.4후퇴, 흥남철수, 38선을 가운데 둔 국지전, 그리고 휴전까지. 몸으로 겪은 분들이야 이 전쟁이 어떻게 잊혀질 수 있겠는가 하겠지만 분단은 독재를 낳았고 반공이 독재정치에 이용되면서 전쟁의 참혹한 기억조차 진위를 의심받았다.
한국전쟁은 미국에서 조차 잊혀진 전쟁이었다. 미군 전사자 5만여명을 낸 이 전쟁이 잊혀진 이유는 조금 달랐다. 2차대전과 베트남전 사이에 끼어 주목을 덜 받았다. 그런 한국전쟁이 왜 지금와서 잊혀지면 안되는 기억이 되었을까. 한국전 기념비나 공원은 이제 미국 도처에 널려 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는 웅변이 따라 붙는다.
본보가 몇차례 보도한 바 있는 시카고 지역의 참전용사들을 위한 워싱턴 DC ‘명예의 비행’에 올해 처음으로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포함시킨 것도 아주 늦긴 했으나 잊지말자는 취지다. 왜 그럴까. 이는 한국의 위상과 관련이 있다. 2차대전 중 태평양전쟁은 미국이 원폭으로 끝냈다. 이겼으니 기릴 만 하다. 베트남 전쟁은 수많은 전사자와 그 기억으로 여전히 고통받는 베테랑을 양산하고도 패퇴한 전쟁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중 전자는 기록과 무용담이 필요하고 후자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노스브룩도서관에서 한국전쟁 사진 및 자료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2층과 3층 한쪽 벽면에 순전히 이진씨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기록물들을 전시 중이다. 맥아더 사진 외에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전시로는 조금 초라하다. 기왕에 할 거면 조금 더 확대하고 짜임새를 갖출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영사관이나 재향군인회, 참전 전우회 등이 함께 했더라면 더 기억할 만한 전시를 꾸밀 수 있지 않았을까.
본보 보도<20일자 A3면> 내용대로 “전우들이 죽어나가는 모습과 손발이 으스러질 만큼 추웠던 기억 때문에 한국 재방문을 단호히 거절했었다”는 노병의 말이 가슴을 쳤다. 지금 85세. 66년전 열아홉의 끓는 나이에도 견디기 힘든 죽음과 추위가 잊혀질 리 없다. 다시 떠올리기 싫었던 그 기억의 잔상을 그는 전시회에서 기꺼이 마주쳤다. 한국이 다시 일어섰고 한국민이 세계의 시민으로 지구촌을 누비는 모습이 그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왔다고 믿는다.
결과는 과거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보상이 되기도 하고 후회로 남기도 한다. 6.25의 기억이 보상이 되려면 지금 세대가 잘 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전쟁은 아직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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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태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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